노트 – [헤비듀티] 발간 기념 토크

2018년 11월 28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명동 플라스크 카페 3층

워크룸 실용 총서 신간인 [헤비듀티] 발간을 기념해 패션 칼럼니스트 박세진님의 강연이 있었어요. 불쾌한 사건으로 사라져버린 잡지 [도미노]가 한창 나올 때 쯤 을지로의 작업실에서 종종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던 세진님의 패션 관련 강연을 듣는 것은 이번이 (아마) 두 번 째. 올해 초 서점 “인덱스”에서 세진님의 저서 [레플리카] 발간 기념 토크를 들은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세진님은 웹사이트 fashionboop을 운영하고, 신문에 “박세진의 입기, 읽기” 칼럼을 연재하며 패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트위터는 @macrostar)

[헤비듀티]에 대한 관심 반, 패션에 대한 박세진님의 관점에 대한 흥미 반으로 찾아간 토크에서 노트하고, 보충한 내용을 공유해봅니다. 강연을 들으며 메모한 것들이기에 ‘정확한 출처’라고 간주할 수 없음을 유의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 강연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언제 있을지 모르는 박세진님의 강연에 꼭 참석해보시기를 추천.


박세진(이하 PSJ): [헤비듀티]라는 책의 좌표? 하나의 경향이 끝날 때 쯤 그것을 정리해서 책을 낸 느낌. (1977년에 발간된 책을 일본에서 복간했고, 그것을 번역한 것이 한국어판 [헤비듀티])

[헤비듀티](1977) 이전에는 [Take Ivy](1965)가 있었음.

[Take Ivy](1965, 출판사 링크) – 2006년에 복간되었음. 미국 아이비리그의 패션을 수집한 일본 베이비 부머 세대의 고전.

[Heavy Duty](1977) – 68혁명 이후 산 밑에 살고 있던 이들의 옷차림을 ‘패션’으로 승화시킨 책.

[The Official Preppy Handbook](1979)

[The Official Preppy Handbook](1979) – 사실은 ‘웃기는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패션 가이드북의 고전’이 됨.

이후 1990년대에는 ‘레플리카’ 문화가 등장했다고.

PSJ: 아이비룩 / 헤비듀티 / 프레피 이 세 경향은 입는 옷이 좀 겹친다. 아이비리그 대학교 다니는 이들이 각각 학교 다닐 때 / 교외활동 할 때 / 프렙 스쿨 때 입는 옷 정도의 구분.

헤비듀티라는 표현을 패션에서 사용하는 것의 정확한 어원과 사용은 오리무중.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어휘. 하지만 요즘 패션에 ‘헤비듀티 경향’이 많이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PSJ: 헤비듀티는 히피운동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반문화(counter culture)와도 관련. 이런 부분을 눈여겨 봐도 좋을 듯 하다.

헤비듀티의 패션과 헤비듀티의 삶. 1970년대 미국에서는 그러한 패션과 삶이 일치할 수 있었으나, 지금에 있어 헤비듀티의 삶이란? 요즘의 아웃도어 웨어가 비록 예전의 헤비듀티 웨어와 비슷해보이지만, 본질적으론 다르다.

일본 잡지 [Popoye] – 2016년, 발간 40주년을 맞아 창간호를 복간했음.

1976년 [뽀빠이] 창간호를 보면 ‘패션’보다 캘리포니아의 ‘라이프스타일’에 중점을 둠.

PSJ: “패션이라는 건 이런 ‘삶’을 살기 위한 부수적인 것일 뿐이에요.”

말하자면, 특정한 패션 스타일에는 스타일의 디테일에 대한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게) ‘패션’이 된 순간부터, ‘기능’과 ‘스타일’이 분리되기 시작. 예전에는 ‘기능’ 중심이었다. (마치 요즘엔 안드로이드 폰보다 애플이 더 잘 팔리는 것처럼.)

PSJ: [Take Ivy](1965)의 경우 미국의 옷을 ‘상상해서’ 만들었음. 하지만 [헤비듀티] 발간 무렵부터, 일본에서 ‘직수입’이 실현됨. (오늘날 우리가 하는 ‘직구.’) 미국’식’ 패션, 일본’식’ 패션이 아니라, ‘진짜’를 찾아나선 것.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성장한 일본의 경제력도 바탕이 되었을 것임. 이런 유행에 맞물려 미국 현지에선 (한물 간) 패션 업체들이 부활하는 효과도 있었다.

[헤비듀티]의 저자는 1969년, 1972년 두 번에 걸쳐 미국에 갔다. 두 번째 방문을 했을 땐 첫 방문 당시 보지 못한 마운틴 클라이머들을 목격. (즉, 혼자서 일하고,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며, 체력 단련을 중시하는 이들). 첫 방문에선 보지 못한 조깅하는 사람들도 목격. (바로 이런 사람들이 파타고니아, 노스페이스를 창립했다.)

PSJ: “다큐멘터리 [Valley Uprising](2014)을 보세요.”

In the shady campgrounds of Yosemite valley, climbers carved out a counterculture lifestyle of dumpster-diving and wild parties that clashed with the conservative values of the National Park Service. And up on the walls, generation after generation has pushed the limits of climbing, vying amongst each other for supremacy on Yosemite’s cliffs. “Valley Uprising” is the riveting, unforgettable tale of this bold rock climbing tradition in Yosemite National Park: half a century of struggle against the laws of gravity — and the laws of the land.
—Sender Films

https://www.imdb.com/title/tt3784160/plotsummary?ref_=tt_ov_pl

PSJ: “헤비듀티 운동을 하던 이들이 현재에 존재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대안적 파카 충전재 등을 사용하려고 했을 겁니다.”

L.L. Beans 통신판매 카탈로그에, 제품에 대한 아주 상세한 설명과 함께 등장하는 아이템들: 스웨터, 마운틴 자켓과 다운 파카. 이것이 헤비듀티 룩의 핵심.

이렇게 카탈로그로 팔리던 것들이 일본으로 유입. [레플리카]에서도 말한 것인데, 헤비듀티는 ‘외부의 문화'(미국에서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진 옷)를 일본에서 ‘패션’으로 받아들인 것.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게 될리가 없죠.

말하자면 소비자 입장에서 헤비듀티는  ‘최신 미국산 옷’. 가게에서도 그런 식으로 판매를 해야겠죠.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브랜드의 ‘목록화’가 필요합니다.

목록화는 곧 구매해야 하는 브랜드와 아이템이 정해진다는 것. 특정 스타일이 유행을 타면, 이런 ‘매뉴얼’이 ‘강화’된다. (일종의 부작용. 그럼 유행이 지나가고 나서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진짜’일까…?)

지금도, 헤비듀티 패션이 구성되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PSJ: 파타고니아는 초창기에 ‘럭비셔츠’로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고 함.)

파타고니아 럭비 셔츠

PSJ: 그런데, “요세미티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이런 걸 ‘패션’으로 인식했을까?” (아마도 아니겠죠.) 그리고 이 문화를 가지고 온 일본인들도 이걸 ‘패션’이라고 생각했을까? 처음에는 튼튼한 물건이니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 요즘도 ‘시에라’ 마운틴 파카는 지나치게 비쌈.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구매하는 이유는, 낡아가는 모습과 소재를 즐기는 셈.)

‘목록화’ 현상의 문제점: 어떤 스타일에 입문을 하면, 이미 만들어진 목록이 너무 많으니 자연스레 매뉴얼을 따르게 됨. 그러면, 누군가 만들어둔 목록에서 부각되는 브랜드가 살아남게 되는 경우가 많다.

파카의 창시자 격인 ‘홀루바Holubar’ 브랜드는 60/40이라는 표현을 제창했음에도,  ‘시에라’가 더 유명함. ‘홀루바’는 현재 알프스 산맥 근처의 이탈리아 근처로 옮겨가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웹사이트 주소도 http://www.holubar.it/)

이제와서 우리가 ‘헤비듀티’를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미국에서는 아직 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비싸서 살 수 없었는데 이제는 살 수 있어’라는 태도로 구매하는 성인 고객도 많고. (1936년에 에디 바우어Eddie Bauer에서 출시한 “Sky Liner” 오리지널과 복각판이 동시에 있는 사진을 보여주심. 일본 고객들이 옛날에 출시된 모델을 너무 원해서 다시 생산했다고. 물론, 복각판은 중국 공장에서 제조.)

(리이슈 전문 브랜드의 제품들을 도판으로 소개. 헤비듀티 열풍을 틈타 복각판을 발매하는 브랜드도 많다고.)

일본에서의 헤비듀티 열풍 덕분에 매출에 도움을 받은 브랜드가 적지 않다. Schott, Filson, L.L. Beans 등.

90년대에 레플리카 열풍과 더불어 복각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청바지 뿐 아니라 헤비듀티 제품도 복각이 시작되었다. 일부 복각판은 심지어 옷 속의 라벨조차 오리지널 미국 옷의 느낌을 재현하고자 했다.

PSJ: 간단히 말하자면, 원래 육체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헤비듀티’옷을  젊은이들이 입기 시작했고, 그것이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지금은 노스페이스가 명예를 차지하고 있음. (그런데, 옛날 헤비듀티 옷들을 보면 상표는 다른데 제품은 거의 동일한 경우가 많다. 같은 공장에서 만든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이제, 과거에 발매했던 ‘전설의 모델’을 재발매하기도 한다. (도판: 노스페이스에서 발매한, 면 소재를 활용한 ‘시에라’ 파카 복각판 & 컬래버레이션 제품들.)

The North Face Men’s Down Sierra 2.0 Jacket

‘헤비듀티’ 시절(1970년대)은 아웃도어 웨어가 생겨나기 시작하던 무렵. 따라서 지금 기준에선 프로토타입, 원형에 가까운 모델들이 당시에 등장했다.

도판: 여러 회사에서 복각한 ‘시에라’ 파카.

그런데 도대체 왜 같은 모델을 여러 회사에서 복각할까…? 이 현상, 이상하지 않나요? ‘시에라’라는 파카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변형된 형태로 만들어진 복각판을 구매하게 되는 걸까…? 비싼 돈을 쓰는 김에, 오리지널을 빈티지로 사거나 정확한 복각판을 구매하지는 않을까?

이렇게 오리지널의 복각판이 계속해서 변주된다. (물론, 청바지 복각판의 경우처럼 똑같은 모델이 셀 수도 없이 재발매, 복각되고 있지는 않음.)

PSJ: “이제 ‘기능’이 ‘스타일’에서 떨어져나가고 있잖아요.” (사람들은) “스타일이 되어버린 기능을 갖고 싶고,” “그걸 복각한 걸 즐기는 문화가 되었어요.”

헤비듀티 시절(1970년대)에는 ‘진짜를 찾아야 해’라는 명제를 가지고, ‘진짜’라고 여겨지는 ‘미국제’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게 혼재한 상태다. 노스페이스는 중국에서 생산되고, 복각판(레플리카)은 일본에서 생산된다. ‘원조’를 중시하는 사람은 ‘역시 미국산이 좋다’고 할 것이고, 기능만을 중시한다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임.

“디자인과 기능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09 S/S 등산복 트렌드” (링크)

도판: 한국의 헤비듀티?

PSJ: 한국에서는 헤비듀티가 존재하지 않았음. 유행 시기를 보면,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미국은 금융 위기 이후. 이유는? 아마도 – 소규모 생산으로 만들어지기 때문?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함. 박세진님의 저서 [레플리카]를 참조할 것.)

그러나 ‘헤비듀티의 삶’은 존재한다. 왜? 등산객이 어마어마하게 존재하기 때문. 술을 많이 먹어서 그렇지, 나름 건강한 라이프스타일 아닌가. 게다가 옷의 기능을 중시하고.

이렇게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등산복 문화의 장점: 복식규정이 매우 리버럴하다. 어쩌면, 고프코어Gorpcore의 아버지 격일까? 자유로운 복장 문화.

“First Came Normcore. Now Get Ready for Gorpcore.” (링크)

도판: 바버 자켓, 필슨 가방. (헤비듀티의 아버지들)

한국에선 헤비듀티 아이템들이 단품 별로 유행을 했다. 왜일까? 이유는 명확치 않음. 잡지나 쇼핑몰에서 소개를 하면서 유행했기 때문인지도. 셀비지 청바지가 유행할 때에도 그랬듯 갑작스럽게 훅 유행했다.

패션 아이템의 뒷 이야기를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야깃 거리를  놓치는 건 아까운 일. 사실 이런 ‘스토리’가 제품의 가격에도 반영된 것인데. 비싼 옷 제값 하려면, 그런 이야기도 알면 좋지 않을까?

헤비듀티 패션에서 중요한 것은 (옷을)  ‘고칠 수 있다’는 것.

도판: 1977년과 2014년의 헤비듀티 룩 차이를 보여주는 [멘즈클럽] 도판

한국의 헤비듀티가 ‘등산복’이라면, 원래 헤비듀티 스타일이 보여준 삶(라이프스타일)은 고프코어에서 반복되고 있다. 패션에서 규범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라 여겨진 것에 의도적으로 반항하기. Ugly beautiful.

헤비듀티의 요점은 패션의 요체를 삶의 태도라고 여긴 것.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의도적으로 입어서, ‘내가 뭘 입든 상관하지 마라’는 식의 반문화적 태도를 보이는 것. 그러나 이것이 트렌드가 되는 순간 불가피하게  ‘목록화’ 현상이 벌어진다. 패션도 결국 사업이고, 판매가 이뤄져야 하니 뭔가를 제시해야 함.

그래서, 고프코어의 정신이 아마 앞으로도 당분가 이어질 것 같다. 고프코어는 예전 기준으로는 ‘못생긴 것’을 의도적으로 끌어내고 있음. 이것이 하이패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되는 상황.

필슨의 Wading Jacket

도판: 헤비듀티의 의미를 생각할 때 생각나는 브랜드, 필슨의 ‘웨이딩 자켓’. 원래는 강 낚시 할 때 물 속에서 입는 자켓. 그러나 이것을 평상복으로 입는 사람들도 있다.

PSJ: (헤비듀티 패션은) “(남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삶이라는 것이 헤비듀티의 핵심”, ‘옷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헤비듀티가 남긴 유산의 핵심인 것 같다.

옷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는 방법.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왜 입는지에 대해서 아는 것. 예를 들어 헤비듀티 의상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없다. 모든 디테일에 이유가 존재함. 그런 식으로 옷을 이해하고, 어떤 디테일의 존재 이유를 찾고, 낡아가는 것이 헤비듀티. “(헤비듀티가) 옷에 대한 다정함이라는 말이 맞다고 저는 생각해요.”


PSJ: 옷을 이해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헤비듀티가 남긴 유산이 아닐까. 한편, 헤비듀티의 삶과 패션에는 이미 교과서가 존재. (바로 복간된 책 [헤비듀티].) 이베이 같은 데서 아이템을 구할 수도 있다.

“옷이 재미있는 건,
옷을 이상하게 입는다고 해서 세상을 망하게 하진 않는다는 겁니다.” 


강연이 끝난 뒤, 카페 플라스크 3층

풀리지 않는 의문

  1. 왜 Norwegian을 “노르베전”으로 번역했을까?
    • 원서의 가타카나 표기를 따랐을까? (일본어로 ‘노르웨이’를 어떻게 쓰는지 찾아보니, 그것도 아닌 듯)
    • 이미 한국어 텍스트에서 “노르베전”이라는 표기가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 걸까?
      • 그렇다면, 패션계의 누군가가 ‘최초의 오타’를 낸 것이 여태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까? (실제로 “노르베전”을 검색하면 패션 관련한 웹페이지가 검색 결과로 등장한다. 링크)
  2. 뒷표지에 등장하는 여우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