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뭉크를 읽는다]

  • 뭉크를 읽는다: 그렇게도 작은 공간에 그렇게나 많은 간절함이 (Sa mye lengsel pa sa liten flate)
  • 저자: 칼 오베 크아우스고르 (Karl Ove Knausgård)
  • 옮긴이: 이유진
  • 출판사: 비트윈
  • 출간일: 2024년 5월 3일

재용의 노트

‘우리가 알던’ 뭉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우리가 알던 뭉크’라는 게 있는지도 조금 의문이 듭니다. 186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1944년 1월 23일에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뭉크의 80년 인생에 대해서, 적어도 저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절규](1893)라는 작품 하나만으로 어렴풋하게 그를 알고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 역시 명확치 않습니다. 제가 아는 [절규]는 작품 그 자체라기 보다 작품에서 파생된 온갖 부차적 시각 이미지와 문화적 영향력에 더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1968~)는 소설가 한강과 비슷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노르웨이의 소설가입니다. 그가 쓴 [나의 투쟁](2009-2011)은 무려 6권짜리 (3,600페이지에 이르는) 자전적 소설로, 그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쓴 자서전과 의도적으로 같은 제목을 붙인 이 책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크나우스고르는 ‘[인형의 집]을 쓴 헨릭 입센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가’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참, 공교롭게도 그는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2017년 뭉크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를 기획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전시는 뭉크를 다뤘다는 것만큼이나 크나우스고르가 기획에 참여했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전시 제목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TOWARDS THE FOREST – KNAUSGÅRD ON MUNCH](2017)였거든요.

이 전시는 뭉크의 소위 ‘대표작’이 아닌 작품들을 대거 소개함으로써 신선한 시각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 동시에, 전시와 함께 출간된 크나우스고르의 책은 종종 지나치게 작가(뭉크 말고 크나우스고르)의 감상이나 개인적인 일화가 개입한다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제게 이 책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부분들은 이렇습니다.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작품들은 거의 전적으로 특정 시기만의 회화들로서, 천칠백 점이 넘는 전체 작품 중 십여 점 정도에 불과하며… 하나의 특정 양식이 뭉크를 가리키고, ‘뭉크스러움’은 곧 그 양식을 가리키는 일종의 악순환 속에서 작품은 관람자를 차단하고, 우리를 배제시켜 버린다. 이러한 움직임은 모더니티, 즉 복제의 시대의 특성이며… (22)

무한히 복제되는 부산물이 원본을 압도해버리는 상황이랄까요. (하나의 원본과, 수만 개의 스크린에 떠 있는 그 부산물의 이미지들. 또한,

예술가는 시간과 장소, 이를 지배하는 언어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진실을 추구하려고 노력하지만, 또한 동시에 시대와 장소의 비자발적인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는데… 시대와 절연한 작품만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받아들여지지만… (32)

예술가와 예술의 아이러니. 여러분은 이번 책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생각을 던지기 위해 쓴 것이며, 뭉크라는 한 인물은 일종의 맥거핀일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고은의 노트

그는 거대한 것들을 개인적이고 내밀한 언어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 [뭉크를 읽는다](244)

걸작은 누구에 의해, 무엇으로 정의될까요? 트레바리를 하며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결코 동의한적 없는, 혹은 동의할 수 없는 걸작이 세상에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일까요? 이미 짜여 있는 세속에 따라 살아가기에도 벅찬 생에에, 100년 전 누군가가 그려놓은 ‘그림 따위’에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은 — 그 어떤 규범보다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뭉크의 경우는 어떤가요? 그 유명한 [절규]를 보고 나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저에겐 여전히 낯선 노르웨이의 작가 크나우스고르는 [절규] 바깥의 작품들을 위주로 이 ‘위대한 화가’를 조명합니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길고 긴 묘사’를 좋아한다는 고백답게, 책의 일부는 현학적인 언어들이 난무하지만, 뭉크와 그의 그림에 진정으로 다가가려는 저자의 태도는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수많은 걸작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대한 좋은 예를 제시해 줍니다. “상직적인 ‘뭉크’는 그의 그림에서 쉽사리 ‘인생’을 덜어내며, 전기적인 ‘뭉크’는 ‘인생’에서 쉽사리 ‘그림’을 덜어낸다”(259)는 저자의 서술은 걸작을 둘러싼 예술가의 생애와 그들의 작업을 어떻게 바라봐야할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지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요아킴과의 인터뷰와 그 앞뒤의 서술 또한 좋았습니다. “왜 그렇게 강한 감동을 주었는지 이해하기까지” 여러 번 곱씹어야 했다던 감독의 말이 와닿았습니다. 무심한 끄덕임이 아니라  왜 좋은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결국 나 스스로와 잘 지내는 일이자, 세상을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어느 미술관에 앉아 뭉크와 그에게 영감을 주고받은 미술가들의 작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상상을 했습니다. 언젠가 그런 시간들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하는 읽기였습니다. 동의 할 수 있는 작품을 앞에 두고 그런 고요한 시간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시대의 걸작을 결정하고 정의하게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질문들

  1. 책에 소개된 작품 중 당신을 가장 오래 머물게했던 작품과 그 기억은 무엇인가요?
  2. 작가를 하나의 대표작에 매몰된 상태로 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함정같은 것일까요?
  3. 예술가(작가)가 자신이 속한 시대와 불화(不和)를 겪는다는 건, 어떤 걸까요?

독서 노트들

우리는 회화는 벽에 걸리게 되어 있다는 암묵지에 지배된다.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을 벽에 걸면 눈으로 본 정보와 전정기관의 정보가 차이나 생기는 어색함이 있다. 이 어색함을 지우려 뭉크는 병든 아이에서 원근법을 꺽어 이중적인 느낌을 자아냈다고 생각한다. 분명 스케치는 모로 누워 있는 모델의 모습을 담았을 걸로 보인다. (…) 나에게 이 스케치를 전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침대 높이에 배치하고 그 앞에 의자를 배치하여 내려다 보게 하고 싶다. 

– ㅇㅇㅇ

이 책을 읽으며 얼마 전에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렸던 뭉크전이 떠올랐다.(…) 유명 작가의 명성에 맞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았고 인파에 휩쓸려서 작품을 봤었다. 감상이 아니라 “보기”였다.(…) 전시회는 실망스러웠었다. 판화 작품들이 많았고 기대했던 <절규>도 내가 알던 버전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뭉크의 기구한 인생을 알게 되고 작품들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 OㅇO

가장 좋았전 것은 책의 206페이지의 글귀이다.

“뭉크와 다른 예술가들을 나란히 놓고 새로운 시각을 찾으려고 시도했던 전시 중 상당수를 봤지만, 뭉크만의 단독 전시가 훨씬 더 좋았던 게, 보고 있는 작품에 연결시킬 수가 있고, 그러다 보면 그의 행위가 명확해지거나 가시화되거든요.”유사성, 혹은 분류에 의해 한 개인이 규정되기 보다는 그 자체에 의해서 경험되고 이해되는 과정.어쩌면 이러한 빠른 변화와 자극에 우리 모두가 지칠 때가 되면, 이러한 개인성이 다시 조명받을지도 모른다.

– ㅇOO

(…)사후에 나의 추억 또는 일기장 같았던 작품을 누군가가 이해하고 느낀다면 그 순간 만큼은 나도 함께 그 작품과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떠한 감정을 느껴도 누군가는 그것을 글로 표현 하거나 사진으로 표현하거나 일기를 표현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을 할텐데 이쯤이면 뭉크의 작품과 더불어 모임에 계신 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하시는지 궁금해졌다

– OㅂO

글 제목: “순할 수가 없는데”

(…)크나우스고르는 뭉크의 그림을 마주하면서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경험을 제안한다. 감상이라는 창구를 통해 작가의 지극히 내밀한 경험을 이해해보고, 감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전체를 동원해서 작품을 느껴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 OㅇO

저자는 “그림들은 그 자체로 말과 개념과 생각을 초월하며, 세상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존재감’을 환기시킨다”라고 말한다. 작품을 볼 때 불쑥 치고 들어오는 감정은 나조차도 영문 모를 때가 있는데 그 순간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를 자각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 그때 나의 존재감을 새삼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운동을 하며 호흡에 집중하게 될 때,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존재감을 알아차려 살아있다는 느낌은 자연히 나 이외 것들의 존재에도 눈을 뜨게 한다.

– OㅂO

책을 읽은 직후, 뭉크에게 다소 무관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는 몰랐던 뭉크의 작품들이 정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들보다 풍경화가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와닿았다. (뭉크의 <배추밭>이 왜 이렇게 좋을까요…)

의미가 제거된 풍경화에서조차도 선택 행위에서 생겨난 듯한 확고한 엄숙함이 있으며, 마치 ‘나는 이것을 보았다’라고 그림이 선언이라도 하는 듯하다. (p.100)

– OㅈO

몇 년 전 노르웨이의 시립 미술관에 방문했다. 내 일상과 사뭇 다른 신비로운 분위기나 과거 시대상을 간접 경험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런 낯설음보다는 다른 종류의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오래전 작품 속 노르웨이의 풍광이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최고의 예술은 자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긴 시간 한결같고 생생한 모습이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 OㅁO

… [절규]가 뭉크의 대표작이긴 하지만 뭉크가 어떤 화가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라는것은 다소 놀라웠다. 전반적으로 저런 작품만 그려낸게 아니라 특정시기에만 그려냈다는점에서  화가란 하나의 특색만을 갖고 평생을 살아가거나 또는 그런 특색이 뚜렷이 없다면 특색을 찾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직업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 OㅅO

사실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관점은 시대와 작품에 대한 것이었다. 만들어졌던 당시에는 어떤 의도였을지라도 현대의 우리가 바라볼 때는 어떠한 시대의 것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 또 그래서 그 시대가 공유한 무언가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볼 때마다 큰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뭉크처럼 많은 작품이 남겨져 있기에 더욱 시대성에서 벗어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는 거기도 하겠지만.  (재용 note: 노르웨이 사람들의 뭉크에 대한 인식 질문)

– OㅅO

만약을 가정해보자.

2024년 한 개인이 유년기에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자 미술치료를 받고 있는데, 동시대적인 형식을 타파하고, 본인만의 양식으로 그린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칭송받을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언제나 ‘선구자’는 결국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위대한 인물로 남아있는 이유는 단순히 위의 이유뿐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 자신이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서 그가 느꼈던 감정으로 우리를 이입시킨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미술치료를 한 개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감정적/심리적 분출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의 작품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존재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내면적 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 OㅅO

앎으로 인해 생기는 이러한 거리감은 다시 좁혀질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한 저자로부터 그 해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뢰고르가 뭉크를 세상과 연결시키는 방법이 그 해답일 수 있을 것 같다. 상징화를 덜어내고 작품을 실용적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보편적인 장으로 그림을 끌어내는 것. 무엇보다도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아니라 뭉크가 보고 있었을 그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 

작가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혹은 무엇을 내면에 저장해두었을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에게 작품 감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부분이었다. 

또한, 반복되는 모티프들과 작품들 간의 유사성은 오히려 고유성과 특색이 보편성으로 바뀌며 시공간을 넘어 다른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Oㅁ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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