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언더 블루 컵]

“약간의 혼란을 일으켜 봐. 확립된 질서를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혼돈으로 변하지. 나는 혼돈의 대리인이야. 그리고 혼돈에 대해 알지? 공정하다는 거야! (Introduce a little anarchy. Upset the established order, and everything becomes chaos. I’m an agent of chaos. Oh, and you know the thing about chaos? It’s fair!)”

영화 [조커](2019)의 대사입니다. 이 대사는 여러분에게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나요? 저는(박재용) 어쩌면 (제가 선호하는) 당대 예술, 현대 미술 혹은 동시대 예술이 영화 속 ‘조커’같은 존재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조커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존 질서의 반대항으로서 완벽한 혼돈을 추구하는 것 역시 제 지향은 아닙니다. 저는 점진적인 진보를 믿는 편이고, 이따름 일어나는 급진적 진전은 개인 차원에서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흥미롭게도 이 책에서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본인이 생각하는 미술/예술을 수호하는 ‘기사(knight)’들을 임명합니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그녀가 “현대미술의 오적(개념미술, 설치미술, 관계미술, 해체주의, 디지털 미디어)이라 지목한 포스트미디엄의 부정적 조건”(280)에 맞선 성스러운 기사단일 텐데요, 물론 “모조리 척결하지ㅏ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벤야민이 19세기의 부정적 조건 속에서 구원의 지표를 발견해내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부정적 사태의 저항력을 도약의 계기로 삼아 현대성을 재인식하자고 주장하는”(280-281)이라고 합니다.

흠. 일단 제 입장은 ‘글쎄요’입니다. 비록 아주 얕은 학문적 훈련을 받았지만, 한국이라는 비서구 국가에 태어나 영문학, 비교문학, 사회학을 학부 수준에서나마 맛보고서 19세기 영국 소설 가운데 사회 변화상을 반영하는 과학소설(sci-fi)을 논문 주제로 삼아 석사를 졸업한, 어쩌다 보니 한국과 그 밖의 미술 현장들을 직간접적으로 겪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즉각적으로 몇 가지 의문에 솟구칩니다.

당신이 말하는 비극은 정말 비극이 맞는가? 당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그것은 과연 방어해야 하는 것인가? 매체가 기억이라면, 그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등등.

심지어 크라우스가 기사로 칭송하는 하룬 파로키에 대한 분석은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겠지만 글쎄요’를 연발하게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임에서!) 어쩌면, 크라우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를 통해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 책이 2011년에 출간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영화 가상의 인물인 ‘조커’의 대사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괴물이 아니야, 그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있을 뿐이야. (I’m Not a Monster, I’m Just Ahead of the Curve.)”

(고은의 노트를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술’은 누구인가? 

‘나의 뇌가 터져버렸다’라고 시작하는 이 책은, 크라우스가 마치 자신의 뇌동맥류처럼 언젠가 터질 수 있는, 혹은 이미 터져버렸을 지도 모를 현대미술의 뇌관에 대한 절박한 우려를 담아 쓴 책이다. ‘(일부)설치미술들’이 표방하는 예술의 경계를 흐리고, ‘매체’와 ‘물질성’의 ‘소중한 기억’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치부하는 것들에 그는 역겨움을 감추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의 뇌는 사실 ‘터져버렸다’ 기 보다는 비교적 작은 출혈이었고, 그의 걱정보다 현대미술계는 오늘도 너무나 멀쩡히 살아남아 있다. 어떤 분야나 이론가들의 설레발은 흥미롭지만 조금 과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성토가 꼭 기우만은 아니었다. 크라우스는 고집스러운 ‘그린버그 류’의 골목대장들과 반쯤은 허무주의와 또 반쯤은 정신을 놓아 버린 것 같은 부산스러운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미디엄’은 예술의 기억을 모두 지우려고 했고, 그 반대의 모더니즘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기에는 답답한 족쇄 같았다. 여기서 크라우스는 언어학을 기반으로 현대미술이론과 비평의 역사에 또 다른 분기점을 만들고자 했다. 그에 대한 다소 거칠지만 문학적이면서도 솔직한 고백이 담긴 책이 ‘언더 블루컵’이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예술로 부르는게 미덕인 오늘,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통쾌한 비판, 그리고 예술이 “소수의 삼류적 담합”이 아닌, 이토록 첨예한 비평 의식 안에서 성장해온 것이라는 투명한 단면을 다시 상기할 수 있게했다. 

질문들

  • ‘미술아냥’에서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술”의 범위는 무엇이라고,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세요?
  •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이 말, 불편한가요? 불편하지 않은가요? 혹은, 내가 이 말에 대해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드는지 살펴보고 그 이유를 ‘메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 혹은, 예술을 가슴으로 느끼나요… 아니면 머리로 느끼나요? 그 중간 어디쯤?
  • 넷플릭스의 화제작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2024)에서 많은 사람이 의외의 재미 포인트로 발견하는 건, ‘맛’이라는 강렬한 감각에 대해 꽤나 논리적이고 구조적으로 이뤄지는 비평입니다. 이 점을 비추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이른바 ‘동시대’) 미술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요?

독서 노트들

  • 실명 노출을 피하기 위해 이름 일부를 가리거나 이니셜 처리합니다. 업로드 순서대로 기재합니다.

카벨의 오토마티즘에 대하여 생각해 봤다. 마인크래프트는 정육면체 블럭을 기본 단위로 해서 제작되었다. 이 유니트안에 갇혀 있다. 이를 벗어 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유치해 보이는 게임처럼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만드는 게임은 없다. 다른 게임보다 제한적이어서 오히려 더 창의적이라는 놀라움을 우리에게 준다.
– oOO

전시회를 가면 충격적인 조형물들을 볼 수가 있었다. 개념미술을 보다 보면 저자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겉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은데 다소 파괴적인 형태인 작품들도 많이 보게 된다. 작가의 의도가 있겠지만 작품의 해설을 들어도 결국 ‘아무렇게나 만들고 의미만 부려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 ㅇOO

책을 읽으며 이 클럽에 왔던 이유를 다시 상기하게 됐다.

태생이 이과인 나에게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미술은 다른차원의 매체로 느껴졌었다.

최근에는 바나나 하나만 테이프로 벽에 덩그러니 붙여진 전시회도 개최됐었는데 이게 왜 예술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대미술은 너무나 다른세계인거 같았다.

그래서 조금 친밀해져보기나 하자 라는 생각에 지원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현대미술은 나와 더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 ㅇOO

이 책에서 계속 언급하는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자 미술의 의미와 존재에 대한 질문이며, 결국 미술을 우리와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보니, 이 책의 생소하고 낯선 단어들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 자신, 우리 인생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 OㅈO

관련 학과 대학원수업에서 한 학기 내내 읽어도 모자른 책을 취미 독서모임인 트레바리에서 선정해 읽는 클럽이 있다니요(실제로 이 책은 니콜라 부리오의 엑스폼과 함께 저를 지난학기 내내 괴롭힌 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 눈을 의심하며 클럽 소개글을 한 번 다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미술에 대해 막연한 호기심을 가진 분들 환영이라고 클럽 소개글에 적혀있었던 것 같은데 이게 정말 맞나요? 더 멀어지기만 하는게 아닐까요? 싶었거든요. 우리 모두 용기를 내봐요. 전공자들도 어려워 소화 힘든 그런 책이니까요!
– OㅇO

읽으면서도 저의 시야가 굉장히 좁은 것인지 너무 어려운것인지도 이제는 헷갈리기도 하고 카톡방에서 재용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보고 용기를 얻어보려 했지만 챗 지피티도 인정한 것으로 보아 오죽하면 챗 지피티도 이렇게 이야기를 할까 싶네요. (Ex. 그녀는 복잡한 이론적 용어와 심오한 철학적 배경을 통해 예술을 분석하기 때문에,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과정을 너무 어렵게 느끼지 않으셨으면 해요!)

네.. 저도 이 과정을 잘 지나갈 수 있을까요? 라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 OㅂO

저자는 기억을 잃은 고통을 경험했지만 그 개념을 활용해 자신의 철학을 전달한다. 우려와 비판의 복잡한 논조 속에 예술에 대한 애착과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와 긍정도 느껴졌다. 저자의 인생에서 참 특별한 작품이지 않을까. 너무 낯선 분야에 문을 두드려 걱정이 되지만 그만큼 다채로운 것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모임을 통해 미술을 즐기는 다양한 시각을 배워보고 싶다.
– ㅇOO

이처럼 현대미술이 난해한 이유는 ‘작품을 통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어서’와 동시에 내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왔는데,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글은 마치 현대미술을 텍스트로 옮겨놓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잘 ‘이해’하는 것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 OㅈO

이제와서 깨달았지만, 나의 마음 속 한켠의 찝찝함은 끝없이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예술이 어딘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과연 어디까지 갈까?‘라는 기대감과 우려를 담아) 그리고 그 불편함은 무엇인가 놓친 상태, 즉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망각으로부터 온 것 같다.

물론 위에 언급한 예술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의 무자비한 남용이 목적 잃은 경주마를 보는 것 같아서 불안감을 야기하는 게 싫을 뿐이다.
– oOO

그 의문의 최고조는 2년 전, 성수동에 있는 S팩토리에서 《Unfold X》 전시를 보고 나서였다. 당시 시간 관계상 꼼꼼히 감상 못 하고, 캡션과 내용을 대강 훑은 탓이기도 했지만, 나를 비롯해 많은 관람객이 기술을 활용해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에 신기해하며 체험하는 곳에서 직접 참여하기도 했는데, 감상 후 후기 나누는 자리에서 어떤 미학적 사유를 말하기도, 듣기도 어려웠었다. 흡사 산업화 시대 각국의 기술 발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람회와 이 전시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특히,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를 바탕으로 작가들이 한 예술을 지탱하는 매체의 기술적 기능을 간파하고 재조직함으로써, 매체의 기술적 본성 내에서 매체를 재창안시키는 이들을 새로운 아방가르드라 칭한 것을 유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의문을 가졌던 박람회와 미술 전시회에서 같은 기술을 활용한 사물을 공산품인지, 미술품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얻었기 때문이다.
– OㅂO

로절린드 크라우스는 현대 미술의 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을 꼽는다. 예술의 고유한 가치와 형식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포스트 미디엄의 흐름 속에서 1. 미학적 표현은 상실되었고, 2.예술의 다양성과 가능성은 개념으로 축소되었으며, 3. 예술과 비예술과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심지어는 예술이 문화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포스트 모더니즘 속에서 예술은 나아갈 방향뿐만 아니라, 모더니즘이 이룩했던 성취마저 소멸됐다.

크라우스는 개인적 경험에 빗대어, 망각의 세태에서 필요한 것은 ‘기억하기’라고 처방한다. 예술이 부정당한 시대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술의 몸을 구축하는 항구한 규칙이라는 것이다. 방황의 시대에서 닻을 내릴 곳이 필요하듯, 크라우스는 매체를 기억하기의 한 형식으로 정의하고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토대로 삼는다. 
– ㅇOO

본인 몸을 챙기기도 바쁠 재활 시기에 이 저자는 병들어가는 미술계가 대단히도 걱정이었나보다. 중간중간 다소 거친 주장과 원색적인 표현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미술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불호령같은 책임은 틀림없다.

현대 미술은 무엇을 망각하고 있었을까? 미술은 현대에 와서 ‘미’를 잃었고 공감하기 어려운 난해한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술을 해석하기보다는 가슴으로 희열을 느끼기를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 OㅁO

현대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후 예술인 것 /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늘 궁금했다. 현대에는 정말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작가 또는 판매자가 이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조건 그것은 예술인 것일까? 크라우스는 이 책에서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에 대해 ‘현대미술의 병적 징후’라고 평가하고, ‘진짜’미술과 ‘가짜’미술을 판단하는 근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 OOㅇ

예술작품이란 것이 돈에 자유로울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가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격도 있으니 

어찌보면 정치랑 비슷하기도 하다. 진짜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을 펼치는게 아니라 정답을 찾을 수 있을거라 가정하고 계속 싸워가는, 
– OㅈO

주관적이지만 직관적으로 예쁘고, 정제되어 있는 작품들을 선택적으로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러한 담론이 불편하고도 외면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다. 예쁘지도 않고, 가끔은 불쾌감마저 주는 것들이 미술사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평가받는지 왜 알아야 하나 싶나 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듯 미술을 좀 더 이해하고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렵고도 불편한 이야기들에 조금 더 귀 기울일 필요는 있겠거니 싶었다.

어쨌거나 이 책이 나에게 던진 질문은 ‘과연 미술의 본질이란 무엇일까?’였다. 아티스트의 예술적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한 ‘고유한 매체’로서 역할하는지, 매체가 무엇이 됐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메시지)’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지, 아니면 둘 다 이거나. 정답은 없다.
– Oㅈ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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