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아냥, “미술 사는 이야기”

  • 제목: 미술 사는 이야기 – 신생공간이라는 사건과
  • 저자: 유지원
  • 출판사: 마티
  • 출간일: 2024년 4월 30일
  • 분량, 무게, 크기: 184쪽 | 256g | 130*225*10mm
  • 도서 분류 (예스24 기준)
    • 국내도서 > 예술 > 미술 > 미술이론/비평

첫 모임

  • 네 달, 네 번에 걸쳐 모임을 이어갈 모임의 첫 번째 시간입니다.
  •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신생공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건’을 출발점 삼는 큐레이터이자 비평가, 번역가인 유지원의 책 [미술 사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 첫 모임이니만큼,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자의 소개와 미술에 대한 입문 계기 등을 돌아가며 나눠보고, 두 클럽장의 노트를 읽고,
  • 생각을 나눠볼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 나누고 각자의 노트를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은의 노트

‘미술’을 ‘(좋아)하는’ 거 말고, ‘사는 거’라고 인식하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미술을 ‘오브젝트’라기 보다는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미술도 엄연히 가치를 평가 받는 사회적 산물이고, 그로인한 거대한 산업은 인간 문명에서 언제나 존재해왔다. 단지, 여기 ‘미술 사는 이야기’에서의 작품들은 몇 억, 몇십 억을 호가하는 경매가가 존재하는 작품이라기 보다 현재 서울을 이루는 가장 젊은, 가까운 그래서 아직은 좀 더 감춰진 작품들일 것이다. 필자는 을지로, 상봉동, 성수 등의 작은 프로젝트 스페이스(*비영리 미술공간)들을 두루 다니며 직접 경험한 미술과 그 결과물을 산다.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내가 속해있다고 가늠하는 서울의 현대미술 씬을 공유하고 있어 반가움이 더했다. 나도 일을 하며 얻어진 작품들이 있는데 선물로 받은 것이나 가끔 직접 돈을 주고 샀더라도, 나의 컬렉션이라기 보다는 전장에서 취한 일종의 기념품 따위 처럼 느껴지곤 한다. 상품/작품의 제작 과정을 너무 속속들이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것들의 소중하지만 작은 경제적 가치 때문이었을까? 

앞으로 미술아냥에서 언급하는 ‘현대미술’은 이 책의 작품들과 닿아있을 것이다. 2015년 경부터 해오기 시작한 미술 일에서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줄곧 함께 해온 셈이다. 나도 필자와 같이 공간 박스안에 몇 개의 조각과 여기 저기 흩어져있는 드로잉들을 꺼내본다. 이것들이 내가 알게된 미술의 일부를 가장 잘 말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재용의 노트

서울문화재단의 “예술현장연구모임지원” 사업에 지원, 선정되었던 (그러나 코로나19로 진행이 여의치 않아 지원금을 1원도 사용하지 않고 전액 반환한) 프로젝트의 지원서의 일부를 가져와 봅니다.

신생 공간, 어디에 있었고, 누가 했으며, 무엇을 했으며, 어디로 갔는가?”

존재하는 것: 

(1) 분절적 내러티브의 산재: 무성한 담론, 소문, 휘발된 온/오프라인상의 대화들

(2) 몇 차례의 전시와 ‘미술 장터’들: <굿-즈>(2015), <서울바벨>(2016, 서울시립미술관), <유령팔>(2018, 서울시립미술관) 등

(3) 역사화의 시도들: 윤원화의 ‘폐허’, 권시우의 ‘유닛’ 논의 등

(4) 논쟁: 신/구 세대의 갈등으로 바라보는 관점, 제도와 비제도의 다툼으로서의 해석 등

존재하지 않는 것:

(1) 냉정한 사실(hard fact): 일시적으로 존재한 다양한 활동의 인덱스, 즉 양적(quantitative) 데이터셋

(2) 인덱스를 기반으로 한 정보의 타임라인

(3) 신생공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미술계에 머무르고 있는 주체들의 경험적(anecdotal) 논의를 넘어서는 관점의 조망

(3) 위 (1)과 (2)를 기반으로한(디지털 인문학적) 접근을 통한 (3)의 발견

(4) 이에 앞서, 현재 하나의 주기를 마친 것으로 가정하는 신생공간 참여 주체들에 대한 질적인(qualitative) 접근의 정보 수집

– “냉정한 사실” 프로젝트 2020 예술현장연구모임지원 활동계획서 중 인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책 [미술 사는 이야기]는 미술을 사는(구매하는) 행위와 그로 인해 미술과 함께 사는(살아가는) 행위를 저자가 겪은 2010년대 중반의 ‘신생공간’이라는 ‘사건'(이라는 저자의 워딩이 흥미롭습니다)을 경유해 풀어낸 에세이집입니다. 잠깐 위의 지원금 문서 내용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5년 전 제가 ‘분절적 내러티브의 산재’라고 했던 상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소문이나 휘발된 대화 대신, 연속성을 지닌 한 개인의 서사를 통해 그 시절(?)을 바라보는 이야기라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모임을 통해 모인 분들은 ‘신생공간’이 도통 무엇인지 낯설어 하실 것 같습니다. 책의 저자가 성심껏 설명하고 있음에도 막상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특히나 여러분이 남겨주신 노트들을 읽고 나니 더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미술계’란 결코 하나의 계(system)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과학적 개념을 엄밀하지 않게 대~충 가져다 쓰면) 일종의 복잡계와 같은 것이거든요. 분명 작가가 있고 큐레이터가 있고 필자가 있는데, 누군가는 평생 단 한 번도 마주칠 일 없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랄까요. 미술계 한 켠에서는 아주 명확한 흐름처럼 보였던 ‘신생공간’이 대부분의 (일반) 애호가와 관객에게는 아무런 가시성이 없었다는 것도 어떤 점에선 ‘그럴 만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내 삶에 미술이 언제 들어왔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미술을 따로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어릴 적 미술 개인 교습을 꽤 긴 시간 동안 받았어요. 거의 10년 가량. 다행히 제 부모님이 제 선생님께 요청한 건 입시 미술이나 스케치가 아니라 그저 ‘표현 연습’이었어요. 꽤 긴 시간을 ‘아무 것도 그리지 않고’ 선 긋기나 붓질에 할애했던 기억이 납니다. 집안에 걸려있던 아담한, 어떤 건 꽤 큰 그림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딱히 현대적이진 않았습니다. 겨울의 산사를 그린 아주 큰 수채화랄지, 민중 판화가로 유명했던 모 작가의 작품 같은 게 걸려 있었지요. 디자이너로 일했던 제 어머니에겐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 ‘아름다운 것’을 수집하거나 보관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대문 시장의 수입 잡지 서점에서 주기적으로 구매했던 외국 패션지에 실린 화보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건 따로 스크랩을 해두시거나, 몇 점은 특별히 신경 쓴 액자에 넣어 본인 작업실이나 사무실에 두곤 했으니까요.

그럼 제가 작품을 처음 산 건 언제였을까… ‘작품을 산다’는 생각보다는 아주 작은 규모로 ‘작품 만드는 걸 돕는’ 일을 먼저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는 대신, 제작 크레딧 속에 영원히 박제되는 쪽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작품’을 수집하는 건 미술 쪽보다 디자인 오브제나 빈티지 의류를 모으는 걸 먼저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를테면 이런 것 말입니다.

Panasonic. Toot-A-Loop Radio (model R-72), (shown closed). 1972. ABS plastic, h. 2 3/4″ (7 cm), diam. 6″ (15.2 cm). Manufactured by Panasonic Company, Secaucus, NJ.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Anne Dixon

우연히(?) 시작한 큐레이터로서의 일을 하면서는 외려 작품 구매와 스스로 거리를 두게 된 것 같기도 해요. 누구도 제게 그러라 하지 않았지만, 잠재적인 ‘이해관계 충돌’을 피하려 애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물론, 그럼에도 이런저런 작품들이 제 공간을 잠식해가는 걸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배우자가 무언가를 구매할 때도 있고, 저 역시도 작은 대안 공간 등에서 일 년에 한 번 쯤은 열리는 기금 마련 전시같은데선 작품을 사거든요. 되팔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말이죠. 언젠가는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미술 작가 동료에게 무턱대고 돈을 줄 수는 없으니, 몇 년에 걸쳐 수천 만원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으로 작품을 산 적도 있기는 합니다. 이것을 투자의 관점으로 여긴다면, 그야말로 앞뒤가 맞지 않는 바보짓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가장 자주 많이 돈을 쓰는 건 미술/예술과 관련된 자료를 구매하는 일입니다. 알음알음 모으기 시작한 자료가 어느새 머지않아 3,000점을 향해가고 있기에 혼자만의 서재가 아닌 여러 사람의 공개 서가를 구축하려 동료들과 애쓰는 중이고요. 어쩌면 이것이 저의 미술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게는 작품대신 종이쪽과 책들이 아래에 나눌 생각할 거리에서 등장하는 ‘예술 전리품’인지도요.

함께 생각해 볼 것들

  • 주로 어디에서 미술을 만나나요? 당신의 생활 속에서는 어디에 미술이 함께 하나요?
  • ‘미술 사는 이야기’에 등장한 작가/작품 중 이미 알고 있었던 작가/작품이 있었나요?    
  • 당신의 ‘미술 전리품’에는 무엇이 있나요? (그것이 꼭 ‘작품’이 아니더라도요!)

책 전반에 대한 의견 나누기를 잊지 말 것!

그리고,

독서 노트들

(업로드 해주신 순서에 따라, 이름을 익명화하여 인용)

현대미술이란게 해석이 분분한 다양성의 세계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왕사는거 가치 있었으면 좋겠는데 비싸면 가치 있는걸까? 불현듯 이중섭의 화가의 은지화가 떠오른다. 과연 누가 당시의 그 가치를 알아봤을까? 또 그 이전의 화가들은 생애 자신의 작품 가치를 보고 세상을 떴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는 세상이다. 이제야 현대미술이 뭔가 알아가나 싶었는데 또 파봐야할 영역이 하나 더 생겼다.

– ㅂOO

글쓴이가 참신기했습니다. 이사람이 뭔가 아주 즐겁고 기묘한 일을 경험했고, 그 경험을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은데(마치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애니를 설명하는 오타쿠와 같이) 그 일이 뭔지는 결국 모르겠으며,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글쓴이가 참 신나하면서도 쓸쓸해보입니다.

– ㄱOO

4) 늘 궁금했던것

미술가와 작품을 미술로 규정하는 

권력에 대하여 자격증이나 대회 수상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이 세계는 결국

언제나 누군가로부터 발견되어서 인정받아야 하는 세계인건데

그래서 비평의 권위가 높겠지만 아니면 컬렉터나.

비평이 돈의 논리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면 미술의 좋고나쁨은 어떻게 얘기될수 있는가?

– ㄱOO

<실키 네이비 스킨>을 기획한 박보마, 신현진, 최고은 작가에 대한 ”무책임“하다는 평이 놀라웠다. 내가 미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예술은 아직 취향의 영역이기에 ‘책임’이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졌다. (…) K-직장인 K-장녀로서 예술마저도 책임을 져야 하나, 예술에서만큼은 무책임함의 가벼움을 누려도 되지 않나 아쉬움도 드는 코멘트였다.

– OㅅO

신생 공간은 본래 의미와 모순되게도 이미 지나간 개념이다. 그렇지만 미술에 사는 한, 주류와 제도가 있는 한, 그의 반反 혹은 대안이 되는 사건은 꾸준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 그 사건을 제대로 목격하기 위해 ‘감각을 열어두는 것’이 미술을 사는 이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독서 모임에서 좋은 감각을 얻을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 OㅁO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동시대보다 후대에 인정받는 것이 더 운이 좋은 것인가?

예술가는 ‘작품’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목적이 분명히 있기에, 당대의 감상자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사후에 후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예술가로서 불운한 인생을 살다가는 것이라서 그것 또한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 OㅅO

 “미술 사는 이야기”가 buy 뿐만 아니라 live 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다. 지금껏 미술은 내가 좋아하는 무색, 무취, 진공의 공간인 미술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만 한정해왔던 마음속 장벽이 이 책만큼 얇아졌다. 조금 더 비전형적이고(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전시를 기준으로) 도전적인(늘 혼자서만 감상했던 것보다) 공간으로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ㄱOO

이 책에서 작가는 ‘굿-즈’를 겪으며 ‘작품을 구매하는 행위’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새롭게 보게 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데, 우연히도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 알게된 경험이 최근에 나에게도 있어서 정말 재밌게 읽었다. (중략) 예술을 소유한다는 것에 떠올리던 어떤..과시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작품을 내 생활공간에 들여놓음으로써 느끼는 새로운 감각을, 매일 아침 현관문에 걸린 오리와 괜히 눈을 맞추며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다.

– OㅅO

“미술을 좋아하는 태도에 대해”

[미술 사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미술을 대했던 태도에 좀 변화를 줘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 책에서 저자가 애착을 가지는 신생 공간의 작품들은 고가도 아니고, 유명한 작품도 아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가치와 의미를 가질 수 있었고, “좋은” 미술일 수 있었다. 그리고 작품들을 직접 구매하고, 그걸 만져보고, 내 집에 전시해 두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내가 거기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다.

– OOㅇ

마찬가지로 미술을 산다는 것 역시 어색하지는 않다. 저자는 처음에는 미술을 판매하는 행위에 대하여 미술이 상품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도 처음에는 구매하고 싶은 그림에 스티커를 붙이면 된다는 동네카페 주인분의 설명을 들으며 생소하다고 느꼈으나 주변카페부터 미용실까지 겔러리처럼 인테리어를 하다보니 익숙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 OㅇO

그 귀찮음이란 내가 미술을 즐기러 가서 얻을 수 있는 심적인 풍족함이 미술관을 가려고 집을 나서야 하는 에너지에 비해 큰 것인가를 계산하다가 결국 가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그냥 생각 없이 나서야 한다) (중략) 통찰력과 미술이 무슨 상관이겠느냐 하겠지만 현대미술은 약간 그 통찰력 연습하기 좋은 도구이기도 하지 않은가.

– ㄱOO

어느 글에선가 무엇이 좋은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나같은 경우는 이렇다. 내가 봐서 좋으면 좋다. 설명을 듣거나 보았는데 좋으면 더 좋다. 명작이라도 내 미음에 별로면 별로다. 그냥 그렇다.

– OㅅO

그리고 10 만원 대의 포스터를 샀고, 이젠 오픈 에디션 또는 페어에서 하나씩 사볼까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렇게 나는 너무 바빠서 정리도 제대로 못해 ‘못생긴 집’에 ‘예쁜 것들’을 사 모으고 있다.

책에서는 ‘덕질의 완성은 부동산’이라고 했다(사실 나는 덕질의 완성은 그릇 이라고 들었지만 from my mom 모두에겐 excuse가 필요하다), 뭐가 됐든 사 모으면 예쁘게 전시를 해야하는데 이건 뭐 전시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오히려 더 커지는 느낌이다.

– OㄷO

책을 읽으면서 오우 나도 나도란 대답을 홀로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저자처럼 전문가도 아니고 미술에 많은 조예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고 어찌나 생각이 들던지 

– OㅂO

내가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일상으로부터의 ‘단절’과 작품에 대한 주제의식 또는 인생의 정수가 담긴 하나의 마스터피스를 감상함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몰입’때문이었다. (중략) 다만, 최근에는 이러한 유형의 미술을 소비하는 것이 재미없어졌는데 그 이유는 작품의 가치를 수치로 나열하고, 대형 아트페어나 갤러리에서도 작품을 감상하는 이가 아닌 ‘투자자’로 대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기 때문이다.

– ㄱ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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