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기 구겐하임, 예술 중독자], 미술아냥

구겐하임 가문의 역사는 지난 1881년 단돈 5000달러에 매입한 콜로라도주 탄광(납과 은을 채광하는)과 함께 시작한다. 구겐하임 가문은 이 탄광을 기반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해 불과 수십년 만에 미국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히는 부호로 떠올랐다.

… 또 다른 박물관과 제휴해 다양한 기금 조성을 위한 전시회를 구겐하임이라는 이름하에 주최했고 이는 곧 구겐하임 박물관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구겐하임의 이런 브랜드 전략은 지난 1990년대 말 가족 사업을 투자 그룹으로 확대하면서 더욱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가족들의 자산 50억달러를 기반으로 시작한 구겐하임 파트너스는 각 분야의 최고 고수를 끌어들여 이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일부 투자그룹이 오너의 독단적 경영에 따라 실패를 맛본 것과는 크게 다른 사례다.

… 각 사업별로 합당한 투자자와 연계하는 이 전략은 매해 엄청난 수익을 거두면서 불과 14년만에 관리 자산 1700억달러로 급증했다. 타 그룹이 위험성 높은 부동산 및 증권 사업에 치중하는 사이 안정적 수익이 보장되는 개별 사업에 분산 투자하면서 자신들의 자본 투자 위험은 최소화 하면서 세계적 경기 불황도 비켜갔다.

…다저스 매입 역시 구겐하임의 브랜드 전략의 성공 사례다. 마이너 투자자이지만 지역스포츠의 상징성이 강한 매직 존슨(5000만달러 투자)을 전면에 내세운 후 자신들은 스탠 캐스턴과 바비 패턴 등 유력 투자자들을 모아 자본을 마련했다.

– “1700억달러 굴리는 구겐하임 파트너스의 실체는” (미주헤럴드경제, 2023년 3월 20일)

Guggenheim Partners는 현재 2,000억 달러(약 280조 원)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가족 차량인 Guggenheim Investment Advisors는 약 500억 달러(약 7,000억 원)의 자산을 관리합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Guggenheim_family#cite_note-3
재용의 노트

최근 흥미롭게 여기는 책, [좋은 불평등: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의 저자 최병천 님의 강연을 이것저것 찾아보고 듣던 중 흥미로운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사실상 20세기 중반에 탄생한 신흥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의 불평등 지수는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 그리고 한국의 부자들이 (역시나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가지고 있는 부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몇 사람이 스쳤다. 하지만, 한 두 세대가 아니라 200여 년에 걸쳐 이어진 (혹은 유럽에서부터 더 오래 이어진) 종류의 부를 기반으로 일어난 ‘현상’으로서의 페기 구겐하임과 같은 인물을 지금의 한국에서 만나기란 어려울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시 살펴보려 표시해둔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 “그러나 현대문학요람에 기고한다는 것은 홈스가 영국 문단의 선구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168)
  • (243) 친구들의 일기 공유
  • (259) “미술품을 수집하고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은 1920~1930년대 부자들이 경쟁적으로 벌이던 활동이었다.”
  • (261) “미술품 거래의 세계는 무법적이었으며 때로는 전혀 존경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 (271) 마르셀 뒤샹 인용 – 브랑쿠시와 프로펠러에 대한 이야기
  • (355) 페기의 성격 – “페기는 신드바드를 포함해서 누구든 마음먹고 뭔가 해 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 (510-511) 10년 동안의 수집과 페기 구겐하임도 알지 못했던 영향력
  • (522) Bernard Rice 부부 베키 라이스
  • (525) “1895년부터 격년으로 베네치아와 리도 사이 모래펄 위의 전시장에서 개최되던 제2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 (532) 관세를 피할 방법
  • (557) “페기는 유럽에서 폴록을 띄우기 위해 1948년 비엔날레에 그의 그림 여섯 점을 전시했다.”
  • (558) “첫 번째 책은 아무 제약 없이 노골적인 여자로서 쓴 것이라면, 두 번째 책은 현대 미술사에서 위치를 확립한 한 여인으로 쓴 것이라고 하겠다”라 했다.
  • (567-568) 존 케이지, 1959년 겨울 5주간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포기냐 더블이냐Lascia o Raddoppia” 퀴즈쇼에 출연, 거리에서 이름이 불릴 정도의 유명인사가 됨.
책에 언급된 게임쇼는 아니지만, 공중파 퀴즈쇼에 출연해 자신의 작품 [Water Walk]를 시연한 존 케이지의 모습

미래를 바라보고 그려낸 활동에 대한 평가는 그 활동이 이뤄진 시점을 기준으로 한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책에 쓰인 내용 대로만 페기 구겐하임의 삶을 바라보면, 그 역시 예술(미술)에 대한 자신의 헌신이 무엇으로 이어질 지는 몰랐던 것 같다. 문득 ANT(행위자-네트워크-이론)으로 페기 구겐하임을, 동시대 미술계를 살펴보고 싶어진다.

1964년 12월 31일자 [뉴욕 타임스] 기사 “Peggy Guggenheim: Collector and Patron”
고은

“페기 구겐하임이 미국을 떠난것은 현대 미국 미술의 심각한 손실이다. 뉴욕의 화랑주인으로서 그는 이 나라의 진지한 젊은 미술가들에게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주었다… 나는, 시간이 감에 따라 그리고 그가 후원한 미술가들이 성숙해질수록 미국 미술사에 있어서 페기 구겐하임의 위치가 더욱 커질 것으로 믿는다.”

–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마이어 구겐하임의 다섯째 아들이자 솔로몬의 동생인 벤자민(Benjamin Guggenheim, 1865-1912)은 1912년에 타이타닉호 사건으로 사망하며 상속녀 페기(원명은 Marguerite Guggenheim, 1898-1979:)를 남기게 된다. 페기가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10 년대에 스티글리츠의 화랑에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전위적 경향들에 대해 지식과 안목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1920년에 유럽에 도착하면서 부터이다. 특히 당시 그와 결혼했던 (1922-28) 작가 로렌스 바일(Lau-rence Vail)을 통해서 전위 경향의 예술가들을 접하게 된다. 

1920년대 파리의몽파르나스는 카페를 중심으로 예술가들의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페기는 여기서 많은 미술가, 문인, 비평가들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르셀 뒤샹이나 프란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를 통해 다다이즘을 알게 되었으며, 1928년의 앙드레 마쏭과의 만남과 1930-40년대의 앙드레 브르통이나 막스 에른스트와의 친분을 통해 초현실주의에 빠지게되었다. 특히 뒤샹의 자문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은 페기는 당대 유럽의 전위적인 작가들로부터 그의 미술적 관점의 근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를 미국에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식시켰을 뿐 아니라 미 국의 독자적인 모더니즘 미술을 형성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 자신이 “추상표현주의는 나의 화랑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듯이, 뉴욕화파의 형성에 있어서그녀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없었다면 미국의 전위미술은 훨씬 더 천천히 전개되었거나 성과가 보다 적은 발전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생각할 거리
  • ‘패트론’은 왜 예술가를 후원할까? ‘패트론’의 의미는 무엇일까?
  • 오늘날 페기 구겐하임이 살아 있다면 어떤 예술을 후원했을까? 당신이 후원하고 싶은 아티스트는? 어떤 마음으로 후원하고 싶은지?
  • 예술품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뭘까…?

독서노트

현재 한국의 미술 시장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컬렉팅에 대한 열망이 최고조인 시기인 듯 보인다. 전과는 달리 소수만이 즐길 수 있었던 시대의 작품들을 다수가 공유하며 소유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새롭고 긍정적인 문화가 생길 수 있다고 예측해본다. 하지만 이것들을 시장의 평가로만 바라본다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 ㅇOO (놀러가기)

히틀러는 왜 페기쨩이 좋아한 예술을 싫어했을까? 그 이유는 아마 모던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대부분 유대인의 작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순수혈통을 좋아하는 히틀러에게는 가히 폭력적이고 저급한 예술 문화였다. 그래서 “퇴폐미술전”은 그들의 열등함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회였을 것이다…

– ㅇOO
A work by the painter Willi Baumeister, who had been denounced by the Nazis as a “degenerate artist,” which was displayed in the first Documenta, in 1955.Credit…Willi Baumeister/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bpk/Staatsgalerie Stuttgart

“인생의 다면성”
…페기에 대한 평가는 극과극으로 엇갈린다. 인색하면서도 자비롭고, 소극적이면서도 자유롭다. …속사정을 알아보면 때로는 현대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점들도 보여, 묘하게 동질감이 들었다.

– ㄱOO (놀러가기)

“저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예술 중독자. 멋진 단어다. … 다른 중독과 달리 ‘예술 중독’은 돈과 지성이 모두 갖춰져야 이를 수 있는 경지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기심과 별개로 저런 삶을 열망할 정도로 부럽지는 않았다.
…늘상 예술 작품 혹은 예술인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고난과 결핍이 없으면 궁극의 예술은 탄생하지 않는 것인가?’
‘성(sex)을 빼고선 예술의 본질을 다룰 수 없는 건가?’

…그녀가 그만큼 마음 두고 머무를 곳이 ‘예술’ 밖에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고난과 결핍이 없으면 좋은 예술가로 성장할 수 없는가?

– ㅂOO

이 책에 기술된 페기의 삶은 아슬아슬하고, 어떤 부분은 나의 통념 상 이해가 안되지만, 어떤 부분은 통쾌하기도 하다. …나는 주로 무용 예술가들과 일을 하면서 나의 일을 ‘천직’이라 할 만큼 재미있고 열정적으로 대해왔다.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것’이라는 부분에서 공감이 간다. 내게 ‘과거’란 현재와 미래의 가치에 필요시 소환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ㅇOO

(여기서 잠깐 박재용의 과거 프로젝트 홍보: 국립현대무용단 창단 10주년 ‘아카이브’ http://10years-of-kncdc.kr/)

“성공의 아이러니”

동시대 파티에서든 어디에서든 그녀를 만났다면 나는 어땠을까.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지만 ‘저 사람은 뭘까’라며 그 매력을 계속해서 곱씹어 볼 것만 같다. …겉과 속이 같고 혼자서도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적나라한 삶을 구구절절 들을 정도로 흥미롭게 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결과만 보면 참 아이러니다. 그녀의 무한한 결핍이 원동력이 되어 ‘구겐하임’이라는 아이코닉한 키워드를 만들어냈다는 게. …현대 미술사를 한 인물로 뚝딱하고 읽고 나니 ‘거장’이라고 추앙하는 예술가들이 주류적 흐름을 타고 초대박이 났다는 것도 놀랍다. 아니,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동시대 인물이었고 얽혀 있었다고? …책을 하나씩 읽을수록 연예인들의 ‘몸 값’처럼 논리적으로, ROI 따져서는 알 수 없는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 ㅇOO

그녀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1. 그녀는 예술과 사랑에 있어 열정적인 사람이다.
2. 그녀는 외로운 늑대같은 사람이다.

– ㅇOO

그린버그는 폴록을 적극적으로 옹호. 비평계의 선구자 자리를 차지. (조금 다르지만) 미스코리아와 미용실원장님? (역시 조금 다르지만) 히딩크와 박지성?

– ㅈOO

페기가 현대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접근성을 향상시켰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여전히 “나와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인식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젠 페기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작가들을 알게 되었으니, 언젠가 베니스나 뉴욕에 다시 가게 된다면 그때는 꼭 구겐하임 미술관을 방문해야 겠다.

– OOㅇ

책을 다 읽고는 한 가지 생각만을 계속 하게 되었다. 페기가 이룬 그 모든 업적과 컬렉션, 영향력을 놔두고 남는 단 한 가지의 생각. 페기는 행복했을까? 수많은 남성편력과 가정사들, 미술품과 얽혀 있는 문제들,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을 것 같은데, 페기는 행복 했을까.

– ㅇOO

작가에게 있어서 믿고 지지해주는 후원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잭슨 폴록 뿐만 아니라 당대에서는 쉽지 않은 기회로 젊은 작가들을 조명하는 전시를 열고, (이를테면 여성작가전) 그들의 작품을 중심에 세우면서 지속적인 지지로 시대를 전환하는 기회에까지 닿게 되다니!

– OOㅅ

페기는 감성과 이성의 두 축 중에 감성의 극단에 치우친 삶을 살았다. 가장 강력한 인간의 본능이라는 ‘오욕칠정’을 가감없이 추구하였고, 세간의 평가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미술을 위해선 전쟁의 위험도 불사했다.

– ㅈOO

멘탈이 좋다는 것은 갈대와 같이 회복성이 좋다는 것도, 나무처럼 굳걷한 것도 의미할 수 있다. 페기는 전자의 의미에서 멘탈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경제적 자유가 있어서 자기 감정에 따라 이것 저것 할 수 있다고 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페기는 굉장히 적극적인 삶을 살다 갔다고 생각한다.

– ㅂ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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