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혹은 동시대미술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종종 전시도 함께 관람하며 다른 도시, 나라로 훌쩍 떠나기도 하는 ‘미술아냥’의 4개월 사이클을 시작하는 첫 모임입니다. 2022년 6월은 미술아냥이 만 6년째를 맞이하는 첫 달이기도 합니다.
첫 모임이지만 쉽지 않은 책을 선택했습니다. 이 모임은 2017년 5월 박재용이 시작했고, 동료 큐레이터인 송고은에게 공동 운영을 요청하여 현재 두 명의 장이 있는 북클럽으로 진행 중입니다. 그냥 ‘예술’도 아니고 그저 ‘종말’도 아닌 ‘예술의 종말’ 게다가 ‘이후’라니. 제목부터 무시무시한 책입니다. 헤겔이나 프랜시스 후쿠야마, 리오타르와 같은 철학자, 사상가들의 이름이 종종 언급될 지도 모르는 모임이지만, 첫 모임이니만큼 가볍게 시작했으면 합니다.
- 모임에 대한 소개
- 멤버들의 자기소개 (이름, 하는 일, 모임에 기대하는 바, 서로에 대한 질문 등)
- 책 전반에 대한 이야기
- 클럽장들의 발제 노트 함께 읽기
- 각자의 노트 읽기와 토론
박재용의 노트
예술작품을 ‘구현 된 의미(embodied meaning)’로 정의하는 단토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 ‘관한’ 것이며, ‘그것의 의미를 구현한다’는 것이다(To be a work of art is to be (i) about something and (ii) to embody its meaning.)”.
이영기, “현대예술과 마주하기: 아서 단토, 이성훈・김광우 옮김(2006), 『예술의 종말 이후: 컨템퍼러리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미술문화
미술은 무엇입니까? 미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내게 미술은 무엇인가요? 등의 질문을 잊을만 하면 한 번씩 던지게 됩니다. [미술아냥] 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은 마치 이런 질문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역사는 끝난 건가요?”
지금도 역사는 진행되고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20세기가 끝나갈 즈음 당당히 ‘역사의 종언’을 외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때 역사라 함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점철된 변증법적인 역사, 그러니까 20세기 사람들의 사유를 지배했던 것으로서의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역사는 계속됩니다. 다만, ‘당신이 역사라고 생각했던 그 역사’가 이제 끝을 맞이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 또한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에다 괄호를 하나 붙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너네들이 지금까지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예술의 종말이 왔다는 말. 그런데 ‘지금까지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예술 혹은 미술이 대체 뭐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좀 아파올 수 있습니다. 이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야 하는 지식의 영역이니까요.
이를테면 이런 식의 예술 혹은 미술이 이제 끝을 맞이했다는 겁니다. 예술/미술은 죽은 게 아니라 그저 끝이 났을 뿐. 전과 다른 새로운 예술/미술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때 예술/미술은 더 자유로워진, 더 철학적인, 더 담론적인 것이 됩니다.
헤겔이나 리오타르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아서, 발제 노트는 일단 여기서 줄여보겠습니다 🙂
송고은의 노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시각예술작품이 무엇처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한 구속이 더 이상 없으므로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의 종말에 살고 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의 일부이다(Danto, 1997: 198).”
현대인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한 시간이자 공간이라고 말한다. 큰 변곡점이라든가, 희대의 개혁의 시대라든가하는 커다란 의미를 이곳에 부여 하곤 한다. 그중 ‘종말’을 논하는 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이곳’에 가장 큰 의미와 애정을 지닌 부류들이다. 회의론자들은 의외로 종말에 관심이 없다. ‘이제,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꿈꾸는 순수한 세계가 이전에 존재했었다고 믿는 믿음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아서 단토는 순혈적인 예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미지근해지며, 온갖 첨가물들로 더럽혀지는 것을 참을 수 없으므로, 그냥 모두 쏟아내고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라고 상상해봤다. 하지만 가엽게도 아서 단토는 예술을 그냥 끝내 버릴 수 없므로(사실, 또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으므로) ‘다원 주의(Pluralism) ‘예술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주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지는 예술에 대한 관점의 토양이 된다.
사실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은 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패러다임이 바꿨다는 주장이다. 특히 그에게 닥친 커다란 시련은 ‘팝아트의 등장’ 이었는데, 이로 인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쉽게 구분할 수 없어 졌기 때문이다. 1960년 이후 예술가들은 예술이 무엇인지를 작품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는 구속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무엇이든지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원주의는 이런 시대를 라고 명명하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타인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차용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모더니즘 시대에는 타인의 작품을 차용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유일성과 독창성이 미술의 최고 가치로 인정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타인이 창조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은 교육적인 목적 등,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팝아트가 등장한 이후부터 차용된 이미지나 오브제는 원 이미지나 오브제와는 다른 의미를 줄 수 있다는 의식이 확산됨에 따라 차용미술은 오늘날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팝아트나 미니멀리즘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일상 사물과 예술작품이 눈으로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단토는 형태의 측면에서는 예술과 일상 사물은 구분이 안 되지만 일상 사물과 달리 예술작품은 무엇을 지시하면서 그 자체로 그것을 보여 준다는 뜻에서, 예술작품은 ① 의미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② 그 의미를 특정한 형식으로 물리 대상에 구현하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팝 아트 등장 이후부터는 한 대 상이 예술작품인지의 여부는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는 눈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전자는 예술작품으로서 후자 가 가지고 있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릴로 상자’의 디자인을 차용하여 동일한 형태의 상자를 만들어서 미국의 풍요로우면서도 표준화된 소비 사회를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의 이미지가 브릴로 세제에 관한 디자인이었다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풍요로운 미국 소비사 회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고, 그 형태의 적절성은 작가가 의도한 목표에 적합한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송고은
- 김정현(2007), “예술적 가치와 미적 가치 구분의 필요성”, 인문논총, 57: 243-270.
- 변경란(2012), “현대회화: 차용과 패러디를 통한 창작의 순환 –20세기 이후 서양 회화의 인물 중심으로”, 교양교육연구, 6(4): 353-376.
- 오세권(2013), “한국 현대미술에서 나타난 ‘차용’표현에 대한 연구 –회화 이미지의 차용을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14(3): 157-170.
- 장민한(2008), “미술비평에서 ‘예술계’의 역할 -아서 단토의 이론을 중심으로”, 미학, 55: 119-147. 진휘연(2009), “차용사진과 저자의 위치: 리처드 프린스의 「말보로 카우보이」 연작 고찰”, 미술사와 시각문화, 8(0): 274-299.
박재용
- Aesthetics after the End of Art: An Interview with Susan Buck-Morss Kester, Grant H Art Journal; Spring 1997
- DANTO, A. The Artworld. Journal of Philosophy, [s. l.], v. 61, p. 571–584, 1964.
몇 가지 생각할 거리
- 정말로 언젠가 ‘예술의 종말’이 올까요? (함정 질문일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하기)
- 예술가는 철학가가 되었다는 생각에… 동의하시나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 ‘미술은 이래야지’, ‘이런 게 미술이지’ 라는 생각을 하세요?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독서노트로부터의 발췌
예술의 종말이후를 근 20여일간 동안 무척 고생하면서 다 읽었다. 읽으면서 “계속 끝까지 이러지는 않겠지, 좀 지나면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되겠지” 하면서 다 읽었는데 정말 끝까지 다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슨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ㅈOO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예술의 종말이라는 그 의미를 충분히 알 것 같아! 그러니 제발 멈춰줘…”
– ㄱOO
아서 단토는 앤디워홀의 <브릴로 박스>전시 이후 예술은 종말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에 불과한 것이 미술관에서는 작품이 되었다는 폄하의 내용이 아닌 예술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는 의미었다.
– ㅂOO
1960년대까지 예술(미술)은 하나의 이야기(narrative), 즉, 미술사라고 불리는 연속성, 인과관계가 있는 역사를 바탕으로 특정한 방향성이 있었는데, 팝아트와 같은 개념이 등장하게 되면서 이후의 예술은 특정한 방향성이 없이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에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이 왔다고 정의한 것 같다. 종말이라고 해서 모든 예술이 끝이 났다는 의미보다는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 ㅇOO
현대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미술 사조(?)라고 할 수 있는 분야는 없는 것 같다. 예술가마다 각기 다른 분야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참고 글을 읽어 보니 아서 단토는 오늘날의 예술 상황을 다원주의 규정하였다고 한다.
– ㅈOO
아서 단토가 주창한 -니즘의 종말 말고 진짜 예술의 종말이 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든다. 예술가 입장에서 최후의 보루는 창조의 주체성 상실이다. (…)기술의 진보 상황을 보건대 컴퓨터의 창조 활동이 인간의 철학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표현 방식까지도 넘어서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느껴진다. 또 한번 예술적인 도약을 이뤄내야 하는 시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 ㄱOO
앤디워홀의 작품, 동일한 박스가 작품이 될지… 슈퍼마켓에 진열된 상품이 될지는…무엇에 의하여 변화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야 말로 그 속에 담긴 스토리와 철학… 무엇인가를 넣어주느냐에 따라 엄청난 가치로 변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난 왜 여기서 젠틀몬스터 브랜드가 운영하는 누데이크 까페가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 ㅇOO
그런 점에서 규정적이라기보다는 반성적이다. 아서 단토는 예술을 철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무엇이 “나에게 좋은 예술일까”를 생각해봤을 때 나에게는 예술의 물리적 토대 역시 아직 중요하다.
– ㅇOO
탈역사적 시대는 사실은 예술의 종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예술의 내러티브 종말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즉, 완전한 다원주의에 들어섰다. …역사의 해방, 예술의 종말은 우리에게 happy ending의 느낌을 준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예술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 ㅇOO
(뒤샹전 관람기 이후)
– ㅅOO
뒤샹전을 관람한 후 마르셀 뒤샹이라는 사람의 일대기 속에서 작가의 철학을 이해하려 애쓰기만 했지, 미술사의 흐름에서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철학적으로 고찰해보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미술은 어느 순간 예술이 되었다.”
– ㅈOO
이 문장을 반복해서 쓰신 이유가 궁금해요!
“마라맛 미술책들의 다원성과 연접성”
– ㅂOO
아…왜 나는 <현대미술 강의>를 제대로 완독하지 않은 것인가… (<현대미술 강의> 안에 ‘모더니즘’+’아방가르드’+’포스트모더니즘’이 잘 정리되어 있다. (후략)
아… 왜 나는 직전 시즌 <마르셀 뒤샹>을 완독하지 않은 것인가… (후략)
대략적인 한 줄 요약은 아래와 같다.
시각예술작품이 무엇처럼 보일 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험적인 구속은 더 이상 없으므로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시각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의 종말에 살고 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의 일부이다.
“변기가 왜 예술인지 이해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
– ㅇOO
…현대에 이르러 왜 더더욱 예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그저 예쁘고 아름다운 (내 눈에) 그림에서 벗어나서 가끔은 기괴하고 불쾌한 것조차도 예술이라고 칭할 수 있는지 기준이 궁금해서였다.
“종말 이후의 이야기”
– ㅊOO
최근에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알아가면서 자유로워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예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현재 무엇이 예술이라 정의되는지를 이해하고 나서야 종말했다고 선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가 종료되고 나서야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는 점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