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은의 노트로부터 시작.
어떤 그림
존 버거의 말처럼 그림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복원’(64p)일까요? 저는 요즘 ‘그림’에 대해 꽤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앞두고 있는 5월 전시를 준비하며, 또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들의 많은 분량은 이미 ‘어떤 그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것의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또 예술가들의 고민들 자주 마주하다보니 저절로 이 그림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 졌습니다. 이 생각들은 작품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코멘트들로 출발하지만, 대부분은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대화 처럼, 넓고 광범위한 질문들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것들은 대화라기 보다는 혼자만의 공상에 가까운 것으로 끝나곤 합니다.
제 공상 중에 하나는 ‘나쁜 예술가의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입니다. 이 질문에서 ‘나쁨’에 대한 기준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림과 작가는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요즘 저의 생각은, 적어도 그림에 한해서 만큼은 예술가와 작품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쪽에 더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유는 그림에서 ‘행위’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작가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위는 어떤 것에 대해 ‘질문하기와 직면하기 그리고 은유하기’라는 그림의 모든 과정을 가르킵니다. 캔버스 위에 쏟아낸 표현 자체가 아무리 작가 고유 것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과정은 한 예술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작품의 원본을 아무리 작가 본인이 따라 그린다해도 그것은 재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작품의 가치는 원본과 절대 동일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또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보통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합니다. 그것은 길게는 몇 백년, 짧게는 불과 며칠전에 일어난 사건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과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행위가 미처 예견하지 못한 미래의 사건들과 함께 그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온전히 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행위자 역시 이 시간을 참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림을 온전히 감상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그것을 단순히 소유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림을, 예술을 좋아하는 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발명품 같은 면모 때문입니다. 그것은 형태와 색, 질감과 텍스처로 이루어진 매우 흥미로운 사물입니다. 그림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복원’하는 일이라면, 예술가들은 그것을 더듬어 현실로 끄집어 내는 일을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도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복원시켰는지는 한참 후에야 알아 차릴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일, 심지어 발명해 내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몫입니다.
박재용의 노트.
존 버거에 대한 다채로운 사실.
1926년에 태어난 존 버거는 1944년부터 46년까지 영국 육군에서 복무한 뒤 런던의 첼시미술대학과 중앙예술대학(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미술을 배웠고, 40년대 말부터 화가로 활동했다.
1958년에 출간한 [우리 시대의 화가(A Painter of Our Time)]는 버거의 첫 소설로, 사회 격변기를 겪고 있는 헝가리에서 런던으로 이주한 야노스 라빈이 어느 날 실종되는 내용을 다룬 형사 소설이었다.
1962년, 버거는 영국에서의 일반적 삶에 염증을 느끼고 프랑스로 이주한 뒤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1972년 BBC 방송 시리즈로 만들어진 [Ways of Seeing](한국어 번역본 [다른 방식으로 보기])은 비평가, 이론가로서의 존 버거를 알린 일종의 출세작(?)이다.
버거는 그 자신이 화가, 소설가, 비평가, 이론가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개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여성 누드화에 대한 백인 남성의 시선을 다룬 부분은 ‘남성적 시선(male gaze)’의 개념을 창안했다. 이후 영화 이론가 로라 멀비는 이에 바탕한 ‘여성적 시선(female gaze)’을 전개하기도 했다.
1980년 버거가 낸 [About Looking](한국어 번역본 [본다는 것에 대하여]) 역시 마찬가지인데, 책의 한 챕터인 “Why looking at animals?”는 이후 동물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버거는 총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결혼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고, 두 번째 결혼에서는 딸과 아들 Katya와 Jacob, 세 번째 결혼에서는 아들 Yves가 태어났다.
그는 1974년에 저자와 독자 출판 협동조합(Writers and Readers Publishing Cooperative)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조합은 80년대 초까지 운영되었다.
버거는 분야를 아울러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8권의 픽션, 4편의 연극, 5편의 영화 각본, 두 권의 시집을 냈고, 이외에 다 세기 어려울 만큼의 대담집, 이론서 등을 출간했다.
2016년, 존 버거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개봉되었다. 제목은 [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s of John Berger]. 놀랍게도,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과 콜린 맥케이브(Colin MacCabe).
한 인물로서의 존 버거는 분야를 넘나드는 창작자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과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놓지 않았습니다.
2007년 출간된 그의 에세이집 [Hold Everything Dear](2007)의 한 구절: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야들’을 서로 잇기 위해서는 학제를 뛰어 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비전은 그 무엇이든 (interdisciplinary라는 단어의 원래 뜻에 충실한 의미로서)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질문들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대화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은유는 무엇인가요?
- 예술 매체 중 당신에게 가장 와닿는 것은?(영상, 조각, 퍼포먼스, 회화, 사진 등)
- 요즘은 어떤 예술(미술)을 보고 싶어요? 어떤 게 끌리나요?
독서 노트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예술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믿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 이OO
두 사람은 편지의 형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나 실은 그들이 언급하는 그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무슨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이 글은 프랑스 특유의 시적인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해가 어렵다.
– 이OO
앵그르의 <목욕하는 여자> 그림을 본 게 떠올랐다(…)단순히 그림 표면을 만져보고 싶다가 아니라 마치 착시 그림을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 마냥 만져서 상상으로 그ㄹ리던 촉감을 실제 확인해보고픈 그런 충동.
– ㅂOO
탁구를 칠 때와 같은 마음으로 그림에 대한 생각을 재미나게 주고 받은 두 부자의 티키타가 대화를 보며 작품에 대한 미술평론도 듣고 동시에 마음 한편이 따뜻하고 훈훈해졌다.
– 이OO
인생의 끝자라에선 저자의 인생관과 예술에 대한 신념과 인생, 삶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뭔가 숙연해 지는 것 같았다.
– 이OO
여러번 책을 읽으면서 계속 결론이 뭐지, 이게 뭘 말하는 건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나를 보면서, 예술을 떠나 최근의 삶을 좀 돌아보게 된 것 같다.
– 이OO
서간집이어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두 책 모두 예술을 이야기해서 따뜻한 걸까? 편지 역시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이고, 예술 역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인 것을 생각하면 그 두 개는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두 서간집 모두 상대를 생각하며 썼을지라도,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가 수신인 편지가 되었다.
– ㅅOO
그림을 둘러보다 보면 별 다른 설명이나 안내 없이도 그림이 마음에 들어와 박히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 최OO
오늘은 조금 다른 독후감이다. 그 전에 일반적인 독후감 잠깐 써본다. 책을 읽으며 얼마 전 방문했던 레지던시 오픈스튜디오 행사였던 작가와 비평가의 대화가 떠올랐다.
– OㅅO
내용 중에 “회화란 보이게 만들어진 촉감”이라고 언급된 부분이 있었는데 저번에 봤던 사빈 모리츠 전시가 생각났다.
– OOo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베르메르가 소녀에게 하늘을 가르키면서 어떤 색이 보이냐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부모와 자식 이전에 그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고자 하는 동역자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묘사하는 구절구절이 초등학교 때 다니던 미술학원 이후로, 아니 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미술 창작 담을 쌓은 내게 어떤 매혹으로 끌어다니는 듯 했다. 그저 관객으로 남지 말라고, 드로잉을 통해 자연을 통역하고, 안료를 섞으며 도를 통하고, 나의 어줍잖은 이성을 제물로 마법 같은 창작의 순간을 마주하라고 말이다.
– OOㅇ
예술에는 많은 분야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나 그림(회화)을 좋아한다.
– ㅇOO
깎아내고 도려내어 점점 더 확실한 윤곽으로 보이게 만드는 종류의 글쓰기만 해왔던 나는, 미술에 대해 잘 쓰는 것이 점점 더 어렵다. 뱅뱅 에두르고 흐트러뜨리면서도 ‘형편없지 않게’ 쓸 자신이 없다고 해야 하나.
– ㅂOO
‘느끼는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고 이브 버거가 쓴 대목에서 멈추었다. 나의 생각이나 느낌이 전확하게 타인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아니 그보다 앞서, 내가 느끼는 것이 정말 그게 맞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 최OO
“어떤 그림”
– ㄱOO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예술가들이 의심을 추구하면서 그것에 직면해 던지는 수수께끼를 우리 각자의 철학으로 대답을 찾는 과정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