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이미지: 1917년 5월 발간된 [The Blind Man] 제2호에 실린 뒤샹의 [샘](을 찍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고은의 노트
“현대 미술은 지난 200년 간의 발명품이다”
미술이 200년 사이 인류가 만든 발명품이라면 그 주역으론 단연 마르셀 뒤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견에 이 책의 저자도 동의하듯 책 커버의 뒷면에 뒤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미래 미술의 조상, 다다의 아버지, 팝아트의 할아버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과연 그는 그럴까? 흔히 갖는 뒤샹에 대한 이미지는 작품 대신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는 반항아, 작품 활동을 멈추고 체스에 매진한 괴짜 정도 일듯하다. 최근에는 ‘에로즈 셀라비’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졌던 그의 내면에 대한 호기심 정도가 추가된 듯하다. 미술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높게 평가 된데에는 사실 그가 활동했던 당대에 있기 보다 타계한 후 그를 추종했던 미국 미술계 유명인사들의 지지로 인한 것일 것이다.
‘미국 미술’이 곧 현대미술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런 ‘미국 미술’이 추앙하는 마르셀 뒤샹의 명성을 우리는 학습하게 된다. 1887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뒤샹이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미국에 온 것은 1915년의 일이다. 당시 20대 후반의 뒤샹은 당시 예술의 본고장이라 불리던 파리에서 갖가지 미술계에 변혁적인 시도들로 주목을 얻은 작가였다. 2차 세계 대전이후 미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기준은 여전히 유럽에 맞춰져 있었다. 뒤샹은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된 미국 최소의 국제 현대미술전 아모리쇼에서 칸디스키, 마티즈 등과 함께 자신의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뒤샹과 그의 친구 피카비아의 작품 앞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군집하며 큰 이목을 얻게되었다. 이후 뒤샹은 입체주의의 뒤를 이어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갈 작가로 추앙되었다. 하지만 책에서 밝혀지든 그가 뉴욕으로 온 것은 ‘파리를 떠나기 위함’이었다.(90p) 그것은 예술계를 떠나려는 그의 강력한 의지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계획은 완벽히 실패했다. 뉴욕에서 발견한 산업시스템의 새로운 양산품들은 그에게 ‘레디메이드 조각’이라는 전혀 다른 작업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그는 미래인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니컬한 유머와 아이러니함을 가진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 되었다.
재용의 노트
한 인간의 삶은 결코 하나의 내러티브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렇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환원reduction은 불가피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때로는 세상의 흐름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완성을 위해 이런 일이 불가피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뒤샹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뒤샹을 한 마디로 축소해 말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념이 미술이 될 수 있게 만든 자. 하지만 그는 아주 복잡한 인물이었고, 재능이 아주 많은 덕분에 몇 사람 몫의 인생을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희망, 절망, 놀라움, 분노마저 안겨주었던 것 같습니다. 미술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뒤집고 싶다고 말했지만, 본인의 작품은 극히 이례적으로 완전한 하나의 컬렉션으로서 (영원불멸의 장소인) 미술관에 소장되게 만들기도 했죠.
우리가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2022년이라는 이 시점은 그 어느때보다 많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이 트위터의 ‘봇’이 되어 되살아나기도 하고, 실제로 머신러닝과 딥페이크를 활용해 죽은 미술가가 관객들과 수십만 가지 대화의 경우의 수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죠.
뒤샹이 타파하고자 했던 ‘미술에 대한 고정 관념’이란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아, 미술이란 이런 것이지’하는 생각에 부합하는 것이리라고 봅니다. 아름다운 것, 평면 위에 그려진 어떤 것,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관념적cerebral이라기 보다 좀 더 육체적corporeal한 것 말입니다. 한 편에서는 모든 것이 다 클라우드에 업로드 된다고 하지만, 그 어느때보다 손에 잡히는 촉각적인tactile 것과 경험적인experiential 것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는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제 눈에는 ‘요즘 미술’ 중 많은 것이 마이클 베이 영화의 폭발 장면과 그리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이른바 “Bayhem”이라고 하는 ‘단 한 순간도 눈을 쉬지 못하게 하면서 끊임 없이 감각을 자극하는 오브제의 움직임과 폭발 말입니다.)
뒤샹의 일대기를 보면, 꽤나 치밀하고 예측 불가의 인물이었던 뒤샹의 삶 역시 이른바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 말고 modern art)’을 둘러싼 인물과 돈의 움직임이 증가하고 ‘제도’라는 것이 생겨나던 시기를 요리조리 잘 헤쳐나간 한 인간의 삶에 다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복잡다단한 인생이 하나의 문장으로 축소되곤 하는 (물론 우리 중 대부분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와 ‘역사’의 한 조각으로 공유되는 일조차 없을 겁니다) 인물이지요. 책의 마지막 문장을 가져와 봅니다.
“뒤상은 1968년에 타계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레디메이드를 처음 소개했던 1917년의 예술가로 인식하고 있으며, 마치 한 세기 전의 전설의 예술가로 간주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p. 323)
오늘 생각해볼 것
- 아모리쇼에 출품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 2)]는 왜 그렇게 당시 미국인들에게 주목을 받았을까?
- ‘미술’은 대체 언제부터 ‘미술’이었을까?
- ‘와 저거 나도 할 수 있는데…’ 근데 왜 그걸 내가 하면 미술이 안되는 걸까요?
멤버들의 독서 노트 발췌 (타이핑 중)
뒤샹의 약국은 화방에서 산 인쇄물에 과수로 약국 사인에서 볼수 있는 빨강과 초록색 점을 찍은 작품이다. 허스트는 뒤샹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는데 약국을 통째로 가져다 놓은 작품 Pharmacy 부터 케비넷에 알략을 진열해 좋은 The Void 등 약에 관련한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많다.
– 김OO (놀러가기로 방문)
과연 무엇을 예술이라고 봐야할까? 예술가의 의도 vs 관람자의 해석?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 ㅈOO
만약 마르쉘 뒤샹이 지금의 시대를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온라인상에서 매일같이 게임을 트위치로 공유하는 침착맨과 같은 모습일지도, 혹은 신박하고 언어유희적 밈들을 생성해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ㅇOO
“이것은 더 이상 구찌가 아니다 – 뒤샹”
– 이OO (놀러가기로 방문)
2000여 마리의 가지각색 나비들이 유리속 안에 박제되어있었다. 뒤샹의 말처럼 나비들은 더 이상 나비가 아니었고 구찌가방의 심벌이 되었다.
“이해하기 힘들고 내 취향은 아닌듯 하지만 천재임이 분명한”
– ㅂOO
시간이 꽤 흘러 다시 만나게 된 뒤샹은 생각보다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일반적인 인간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천재인 인간.
“뒤샹은 이제 없다?!?”
– 손OO (놀러가기로 방문)
현대 미술은 앞으로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뒤샹같이 넓은 분야에 파격을 주는 인물은 다시 찾아오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건 딱히 중요한 지점이 아니기도 하다. 새로운 토대를 위에서 다른 것들을 일구어갈 뿐이다.
책을 읽고 나서 뒤샹에 대해 나름대로 대표 키워드를 꼽아보니 다음과 같이 3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레디메이드, 뉴욕, 그리고 체스.
– ㅇOO
…전혀 다른 뒤샹이 내게 다가왔다. 이제 뒤샹은 더이상 레디메이드, 그 한마디로 정의되는 작가는 아니다.
– OOㅇ
“전위예술가 대단한 열정 그리고 삐딱함의 극치”
– ㅇOO
내가 궁금한 점은 마르셀 뒤샹이 어떤 계기로 다른 예술가와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천재 예술가로 하여금 현실을 해체하고 거부하고 새롭게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시각의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즉, 사물의 선택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미술가의 의도적 개입은 선택의 우연성으로 배제하고, 선택의 기준은 시각적 냉담이 되게 한 것이다.”
조주연, [현대미술 강의: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 중에서
“The readymade also defied the notion that art must be beautiful. Duchamp claimed to have chosen everyday objects “based on a reaction of visual indifference, with at the same time a total absence of good or bad taste….” In doing so, Duchamp paved the way for Conceptual art—work that was “in the service of the mind,” as opposed to a purely “retinal” art, intended only to please the eye.”
https://www.moma.org/learn/moma_learning/themes/dada/marcel-duchamp-and-the-readymade/
첫째, 기성품인 레디메이드는 정확하게 말하면 뒤샹에 의해 ‘가려 뽑힌’ 용어이다. …곧 선택하는 일에 의해 일반어를 특수어로 만드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https://monthlyart.com/encyclopedia/레디메이드/
…둘째, 레디메이드는 뒤샹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뒤샹의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패러독스를 지적할 수 있다.
In the early 19th century, women’s fashion was highly ornate and dependent on a precise fit, so ready-to-wear garments for women did not become widely available until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Before, women would alter their previously styled clothing in order to stay up to date with fashion trends. Women with larger incomes purchased new, fully tailored clothing in current styles while middle-class and lower-class women adjusted their clothing to fit changes in fashion by adding new neck collars, shortening skirts, or cinching shirt waists.
https://en.wikipedia.org/wiki/Ready-to-wear#History
그의 확고한 주관과 실행력에 감탄했고, 한편으론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좋았다. 소신을 지키면서 천진함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뒤샹이 후대에 남긴 메시지는 각 예술가의 마음에 새겨졌으리라 생각한다.
– ㄱOO
쉬잔에게 준 뒤샹의 편지속 지침이 이미 늦어버렸다며, 뒤샹이 레디메이드 조각으로 만들려던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가 쓰레기인줄 알고 버려졌다는 대목에서 빵 터졌다.
– COO
…그것이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편지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존재들.
뒤샹의 방식으로라면 기성품과 일상의 물건도 배치와 구조를 다르게 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전시하면 작품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작품이라는 실체보다 작품이 담는 의미나 개념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여러 유의미한 질문들이 나올 수 있는데 내가 궁금한 건 이런 것이다.
– ㅂOO
뒤샹의 [샘] 출품은 예술가의 역할과 과연 무엇이 미술인가에 대한 그 시대의 고민에 의해 해석되었다. 브르통은 ‘뒤샹은 대량생산품에 서명함으로써 선택이 개인적으로 독립된 행위임을 시위한 첫 번째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레디메이드는 미술을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부정하는 미술품이 되었고 뒤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버지’가 되었다.
– ㄱOO
뒤샹이 원했던 건 아직까지 눈으로 보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을 만들어 전통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도 탈출하기를 원했는데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발명하고 싶었다고 했다. – 165p.
자신을 표현하기보다 발명하고 싶었다는 말이 끝까지 새로움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기존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