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아냥, [아이웨이웨이: 육성으로 듣는 그의 삶, 예술, 세계]

‘DJ 스푸키’의 다큐멘터리 <Ordos 100> 리믹스. 거대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과도한 부동산 개발-투기로 인해 양산된 유령 도시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참고: “The ghost town Ai Weiwei built” on The Architectural Review https://www.architectural-review.com/essays/the-ghost-town-ai-weiwei-built. 최근 큰 뉴스였던 중국 헝다 그룹 부도 사태는 이미 2000년대 부터 예비된 것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모임

[미술아냥] 첫 모임은 서울과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진행됩니다.

  • 첫 모임인 만큼 서로 하는 일, 관심사, 이 모임에 함께하는 이유 등을 공유하며 소개하는 데 힘을 쏟고,
  • 책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 인상과
  • 미술, 현대/동시대 미술에 대한 경험과 관점
  • 각자 작성한 독서노트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송고은, 박재용이 각자 쓴 노트부터 공유하겠습니다.

송고은의 노트

한번도 작가와의 대화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큐레이터를 본적 없다. 예산안, 운송, 보험, 층층시하의 결정 구조,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준비기간, 보도자료, 기자간담회, 전시 글쓰기, 연계 프로그램 진행(특히 큐레이터 토크), 설치(때문에 주말에 일하기)등에 대해 불평하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절대! 작가의 작업실 방문 그리고 그들과의 인터뷰에 난색을 표하는 동료들의 불평을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어찌되었건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만남이므로 각각의 경험이 다를 수 있겠지만 각 예술가들이 지닌  세상과 예술에 자신만의 관점은 언제들어도 꽤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종종 논리의 비약이 존재하며 다소 나이브하게 여겨질 만큼의 순진한 생각으로 치부 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이 지속적인 사랑을 얻고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에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만난 한 예술가가 있다. 그는 한국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아이 웨이웨이같은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를 담은 작품으로 유명한데, 그런 그의 행보를 두고 많은 논란들이 일어나곤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자신은 ‘당연한 이야기’를 할 뿐이라고 한다. 스스로가 생각할 때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만일 이것을 왜곡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현재 우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의 작품은 당연히 주목해야 하지만 소외된 개인의 역사와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지만 애써 감추고 있는 사회의 이면들에 대해 다시 질문할 뿐이었다. ‘ 이거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혹시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하진 않겠냐고…’ 이를 두고 혹자는 해결될 수 없는 일에 딴지만 거는 귀찮은 질문으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실제 세상을 바꾸는데 가장 합리적인 도구가 아닌 것은 지난 아방가르드와 정치 선전에 악용된 미술의 역사들로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러나 또한 예술이 하는 이런 질문 조차 부정되는 세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에 대해 우리는 익히 알고있다. 


역사는 불행히도 반복된다고 했다. 과거의 일로만 치부되었던 자유에 대한 탄합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더 공고하게 일상을 파고든다. 이런 일상에 예술은 언제나 반응(sensing)할 뿐이다.

<퇴폐미술전>이란 이름으로 1937년 7월 13일 독일 뮌헨에서 시작된 전시. 이후 독일 전역에 순회 전시가 열렸다. 독일적이지 않은, 즉, ‘순수하지 않은’ 예술 작품을 고발하고 폄훼하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아래 선전부장 괴벨스의 지휘로 기획되었다. 당시 이 전시에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올린 예술가들은 키르히너, 에른스트, 칸딘스키 등 나치시대 이후 모두 거장으로 주목받은 작가들이었다. 여기에 호명된 예술가들은 독일을 떠나 스위스나 미국등으로 이주했다.

박재용의 노트

제가 농담처럼 (진심을 담아) 말하는 것 가운데 ‘꿔다놓은 보릿자루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란 자신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표현이죠. 시차 적응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오늘은 두 가지 자료를 공유하는 것으로 노트를 갈음하겠습니다.

  • 먼저, 2019년 9월 6일, 영등포 “공간 413” 개관 10주년 기념 행사 발표에 사용한 자료: ““공간 413” 10주년 행사 세미나/토크를 위한 2009~2019년 미술계 타임라인 (Draft) (Last Updated: 2019년 9월 6일 오전 10시)” 구글 문서 링크
  • 2020년 5월 8일, 서울 청년예술청 SAPY 개관 준비 포럼 발제 노트, “꿔다놓은 보릿자루 되지 않기” (청년예술청 SAPY 홈페이지 링크 / 인스타그램 링크)

2020년대 ‘한국’(혹은 서울) 미술은 어떤 꼴을 띠고, 어떤 흐름을 따라갈까? 김효재 작가와 나는 2018년 중반을 이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보냈다. 몇 달에 걸쳐, 몇 주에 한 번 만나 1980년대 이후 주요 전시의 도록이나 주요 의제를 다룬 출판물을 나누어 보거나 담소를 나누어 보았다. 몇 달간의 대화 끝에 내린 결론을 먼저 말해보자면, 이렇다.

썩 유쾌한 발언은 아니지만,
이른바 남한의 민주화 이후 ‘현대 미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역할을 잘 해왔고,
2020년대에도 그 상황을 피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듯 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 하면 미술의 존재감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으니, 말을 조금 바꿔 보자: 항상 빠른 변화가 일어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2020년대에는 더 격변할 지 모르는) 한국 사회에서 ‘현대(혹은 동시대) 미술’에 종사하는 작가들은 각자의 맥락에서 제 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꽤 많은 것이 국가 주도로 ‘조성된’ 한국에서는
미술 또한 그러한 손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를 벗어나려는 노력이나 의식도 많지 않았다.
미술인들이 제도와 기반 시설의 구축을 톱아보지 않는 사이,
한국-서울 미술은 몇 가지 제도가 그려놓은 방향을 향해 선회하고 있다.

예컨대, 1993년 취임한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세계화’(공식 문서에 globalization이 아닌 ‘segyehwa’라는 표기를 썼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기치에 따라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렸고, 같은 해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선 백남준의 제안과 주도로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이 열렸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서울에서의 휘트니 비엔날레 개최는 한국에서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불과 2년 뒤인 1995년에는 제1회 광주비엔날레가 개최되며 국제적인 거대 행사로써 현대 미술 전시를 일반 대중에게 선보였다. 주제인 “경계를 넘어”는 “국가 민족 이념 종교 등을 초월하여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세계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메시지를 전한다고 알려졌다. (1994년에는 쌍용제지의 고급 휴지 ‘스카티’ 광고 모델로 연예인이 아닌 김선정 큐레이터가 등장해 현대 미술 종사자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고양시키기도 했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에서 비롯한 IMF 구제금융과 2001년 금융 관리체제 종료 시점 사이에는 대안공간 풀, 대안공간 루프 등 대안 공간이 부상했다. 흥미롭게도 아트선재센터, 일민미술관 등 서울의 주요 현대미술관 역시 이 시기에 개관하거나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했다. 이후 약 10여년 간 ‘대안공간’의 시대가 이어졌고, 같은 시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다. (이 시기에 이른바 ‘좌파’ 예술인에 대한 정부 지원이 지나쳤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지난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건에는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것은,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1만여 명에 달하는 블랙리스트에서 미술인의 이름은 극소수였다는 사실. 한국-서울에서 미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웃기고 슬픈 사례라 하겠다.)

펀드와 부동산 열풍으로 얼룩진 노무현 정권(2003~2008)은 사업가 출신임을 내세워 당선된 이명박의 집권(2008~2013)으로 마무리되었고, 2008년을 기점으로 벌어진 전 지구적 금융 위기와 더불어 대안공간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시기, 정확히는 노무현 정권 말기인2006년 1월에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인들이 흔히 ‘아르코’라 부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시절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도해 만든 문화예술진흥위원회(문예위)를 전신으로 하며 (덕분에 김종필은 1999년 제1회 자랑스러운 미술인 상을 받기도 했다), 예술 창작 지원에 초점을 맞춘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이와 달리 예술의 경영과 유통을 함양하는 것을 창립 목적으로 삼았다.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2005년 발언을 생각해보면 (공교롭게도 2005년은 국제갤러리, 서울 옥션, 케이 옥션이 1,123억, 547억, 152억 원으로 사상 최대 매출을 달성한 해였다), 창작 지원이 아닌 예술 경영과 유통 지원 기관의 설립은 꽤나 합리적인 수순이었다.

그래서, 2020년대 한국-서울 미술은 어떻게 될까. 역사란 항상 사후적으로 쓰이는 것이기에 현장에 속한 입장에서 성급한 역사화는 피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 또한 그만큼 불확실한 발언에 불가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두 세 문단으로 짧게 요약한 일련의 흐름에 이어 근과거와 지금의 한국-서울 미술의 일부를 살펴보고, 이미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는 국내외의 행사/사건을 생각해보면 어렴풋하게나마 근미래를 예측/상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14년, 그간 공연예술 위주로 경영과 유통 지원 정책을 펼치던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미술 분야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의 하나인 “작가미술장터”의 수혜를 받은 대표적인 프로젝트는 2015년 (지금은 해체된) 커먼센터에서 열린 <오늘의 살롱>과 광화문 세종문화센터 지하의 임시 공간에서 열린 <굿-즈 2015>. 결과물에 대한 수량적 산출이 모호한 창작 지원을 줄이는 대신 개별 작가들이 시장 안에서 자율적 주체로 살아남도록 함양하겠다는 제도가 부상한다는 것은, 이 제도를 기반으로 일련의 미술 행사들이 해를 거듭해 규모를 확대하며 반복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퍼폼>, <더 스크랩>, <팩> 등 주목할 만한 (혹은 다수에게 회자되는) 여러 미술 관련 행사가 예술가의 자조와 자립을 위한 장터 사업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오늘날 한국-서울 사회에서 미술의 위치와 작가의 역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어떤 명제를 도출할 수 있을까? 혹은,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의 한국-서울 미술의 가장 최적화된 형태일까?

그런가 하면, 다가올 202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정치 사회적 변화를 앞두고 있다. 우선 #MeToo에 앞서 촉발된 #OO계성폭력 공론화는 (비록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질 지, 더 공고한 백래시를 촉발할 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한국 사회의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문재인-트럼프-김정은의 회담과 협상은 60년이 넘게 남한 사회의 절대적 타자로 존재한 북한과의 전쟁이라는 불안을 해소하려는 참이다 (이미 누군가는 분명 ‘제1회 평양 비엔날레’ 따위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2020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열린다. 2021년 동계 아시안 게임은 남북 공동 개최로 진행될지 모르고, 2022년은 한국의 다음 대선으로 시작한다. 2020년은 뉴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서울국제뉴미디어비엔날레의 10주년이며, 박원순 시장 집권과 함께 시작된 서울건축비엔날레 (어느덧 명칭에서 ‘건축’이라는 단어를 빼고 ‘서울비엔날레’로 브랜딩이 이뤄지고 있다) 역시 3회를 맞이한다. 같은 해에는 도쿄 올림픽이 개최된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 시작된 강원국제비엔날레는 2회를 맞이할까?) 그런가 하면, 2022년에는 서울시가 3000억의 예산을 들인 ‘뮤지엄 시티’ 프로젝트가 13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서울시 전역에서 개관하게 될 예정이다. 1995년 아시아권 최초의 국제 비엔날레로 창립되었으나IMF 구제 금융으로 한 해를 건너뛰고 짝수 해 개최 행사가 된 광주비엔날레는 2020년대에 30주년을 맞이한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변함 없이 역동적인 사회 변화가 예견된 2020년대의 한국-서울에서 미술은 또 어떤 형태의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존재할까? 혹은, 어떻게 부지불식 간에 정부 정책의 큰 그림을 따라가게 될까? (마치 한 때 ‘다원예술’과 ‘커뮤니티 아트’, ‘공공미술’이 유행처럼 지나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회 변화에 앞서거나 정책 입안에 포착되지 않는 의외의 움직임을 보여줄까? 정부에서 제공하는 “온-나라 정책연구”(prism.go.kr) 상의 정책연구 자료에서 “미술”을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지금 이 순간 제도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들이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예비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적어도 앞으로 5~10년의 미래 정책을 예비하는 자료들은 “통일”, “미술 시장”, “노동”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만약 2020년대의 말에 이르러 10년 전의 시점인 2010년대를 돌아본다면, 한국-서울 미술에 관해 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2000년대 말의 미술시장 과열과 추락, 정부 주도의 시장 활성화 정책, 대안 공간의 쇠락과 소규모 공간의 명멸, 예술품과 소량 제작 상품의 중간 지대를 오가는 예술 활동 등으로 요약될 지 모르고, 어쩌면 ‘자본주의 미술’로 규정될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2020년대는 이미 2010년대에 벌어지고 있는 혼란에 덧붙여 통일 논의를 비롯한 더 큰 사회적 변화가 겹쳐 과거를 돌아보기 더 어려운 시기가 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미술을 둘러싼 제도와 기반 시설에 관해 꼼꼼히 톱아보고 제 위치에 관해 고민하지 않는 한 5년, 10년을 앞두고 짜여진 제도의 큰 틀 안에서 다시 한 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함께 생각할 것들

  • 내가 생각하는 (동시대) 미술가의 모습은? (상상의 인물을 한 번 그려볼까요?)
  • 내가 주로 접하고 있는 미술은 어떤 것들인지?
  •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말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여러분의 독서 노트에서 짧게 발췌

 문득 중국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과연 이십년 뒤 중국은 어떤 모습이려나, 아이웨이웨이 같은 이들은 이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을테며 앞으로 더 많아질텐데…
– ㅂOO

예술은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아름다움과 추악함, 선과 악, 숭배와 비판, 맹목적 찬양과 혐오 등. 또 그렇기에 예술은 우리에게 뭔가를 생각하고 돌아볼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대인 지금, 예술은 지금 여기를 담는 창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우리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고!’ 하고 외쳐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리 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  
– ㅅOO

검색해보니 2022년 베이징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두렵기까지 한 올림픽이다. 그래도 2013년 전에는 류 샤오나 아이 웨이웨이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아무 이름도 모르게 되었고 올림픽 만이 다시 되돌아온다. 
– ㅂOO

예술가들은 자유로워야하는가?
왜 억압하는 것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이 
예술가들에게 권리 혹은 의무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운것을 만들어 내려는 정서적 에너지가 망가질거라 느끼기 때문인가 
사고의 폭이 권력에 길들여기저나 자신의 상상력이 그리 높아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미적 수준 아래 머물게 될까 두려워서 인가? 
– ㅇOO

(아이 웨이웨이가) 베이징 한복판에서 미국 국기를 활용한 작품을 전시한 것 자체가 베이징의 풍경을 영상으로 남기는 프로젝나, 레스보스에서 진행한 난민 관련 프록젝트, 올림픽이 끝난 이후 스타디움이 베이징 시민들 사이에 녹아들기를 원했다는 그의 발언을 보면 각 도시가 갖는 지역적 특성이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 세계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 COO  

그는 블로그가 현대의 드로잉이며, 본인이 쓴 블로그가 곧 작품의 일부라고 했다. 비록 나는 예술가나 시인, 건축가는 아니지만 내 글도 나의 작품의 일부이기에 글쓰기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COO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된…책”

그런 면에서 아이웨이웨이의 정치활동가로서의 미술가, 건축가, 영화, 사진가로서의 활동은 분명 현대에서 요구하는 다른 작업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하겠지만, 그의 사회적 예술활동은 내가 본래 추구하던 예술의 방향이었던 것 같다.
– COO

“예술이 무력한 땅 위에서, 그래도 안녕하길”

…순간 <상흔을 넘어>에서 만났던 예술가들까지도 안위가 걱정되어 한참을 구글링했다. 예술이 무력해지는 나라에서 과연 더 이상 미래가 있을까?
– SOO

“무엇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까”

1. 자유, 2. 표현, 3. 행동
– KOO

“넌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지?”

그러나 더 시간이 흐르고 미술을 책이건 실물로건 접하면서 ‘미술은 이미지(형상)으로 하는 철학’같앋. 다만 이미지(형상)의 종류와 범주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질 뿐이다. … 미술이 나시 나에게 묻는다.

“넌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지?”
– ㅂOO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그의 삶이 뻐구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주인공 맥 머피의 그것과 묘한 중첩을 이루는 것 같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 이OO

여태껏 내게 있어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웨이웨이에게 예술은 아름다움과 같은 가벼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 예술은 무기였고, 이는 무겁고 강력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 김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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