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구독서비스 BGA
매일 밤 11시에 받아보는 한점의 그림과 이야기.www.bgaworks.com
송고은의 노트.
인간은 이상합니다. 지구 상에 어떤 것도 발 아래 두는 무지막지한 존재였다가도 멀리서 비추는 옅은 광선, 동물의 부드러운 척추뼈, 단순한 색과 형태, 공기와 소리의 조용한 울림에 여지 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런 내면의 무너짐을 낚기 위해서 몇 시간이고 텅 빈 공간을 헤매기도 하고 자신의 땀과 휴일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예술이 아무리 역사와 철학, 과학과 기호학 등으로 무장 해도 절대 포기 할 수 없는 것은 그 짧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 처럼, 때론 작은 물결 같이 찾아 옵니다. 지난 밤 찾아왔던 BGA의 편지들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아요. 오늘은 BGA의 두 분 정윤하, 추성아님과 함께 밤 11시의 작품과 글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그리고 필사하는 기분으로 발췌한 여러분의 ‘컴필레이션’을 같이 읽어보아요.
& 박재용의 노트
(고은의 노트에 이어)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가 ‘동굴벽화’라고 부르는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고, 또 우리가 오늘날 ‘미술’이라고 부르게 된 것들이 만들어지고 난 뒤 얼마나 많은 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졌을까요? 누군가는 지금을 ‘예술 대량생산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작업들이 이뤄지고 그것을 감상하는 활동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도 진행 중인 ‘팬데믹’ 과정에 있는 지금 (‘이후’라는 말은 피하고자 합니다), 수십년에 걸쳐 진행된 개별화personalization와 디지털화가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미술 혹은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 걸까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오감 – 특히나 시각에 다가오는 미술 (혹은 시각예술) 작품의 감상이 여전히 우리에게 소구하는 지점은 또한 무엇일까요?
BGA의 두 분에게 서비스의 탄생과 운영, 과거와 현재, 미래를 들어보고, 각자가 쓴 ‘컴필레이션’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질문-생각할 것
- ‘감상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직접 작품에 대한 감상문을 써 보신 경험은 어떠셨나요? (혹은, 글을 써보니 – 내가 본 작품의 감상을 글을 통해 타인과 공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여러분에게, (미술) 작품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 팬데믹을 살아가는 지금, 여러분이 미술을 접하고 감상하는 방법 또한 변화하고 있나요? (혹은, 그러한 모습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이 있다면?)
전체/부분 감상문
고DO
아이는 책에서 그림을 본다. 이야기 속 아기의 침대 아래 떨어진 곰 인형, 호랑이가 나오는 수풀 옆 나무 위 새 한마리까지 그림에서 빠뜨리지 않고 찾아낸다. 분명 동화는 친절하게 적어 준 이야기가 있는데 아이들은 그림을 보며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대개는 그 두 이야기가 서로 닮아 있지만 가끔 발랄하게 엉뚱한 상상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어느새 아이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그림 옆 누군가 이미 써 놓은 글을 찾아낸다.
김DO
개인적으로 사진에서는 큰 인상을 받는 편이 아니어서 미술관을 갈때도 사진전은 잘 가지 않는 편인데, 물성을 120% 활용해 사진보다도 더 사진같은 작품을 만들어낸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 뭉친? 돌들이 엄청난 역사를 그대로 대변하는 실체이면서도, ‘뭔가 말하지 못해 끙끙대는 모습’ 이라는 표현 자체가 참 놀라운것 같다.
윤OO – 이은새<강제 관람>
시험을 꽤 여러번 떨어져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묻지 않는 것이 배려라는 것이다.
보아주길 원치 않는 것이 안보이는 무던함
보아주길 바라는 것을 발견하는 예민함
모두를 갖추는걸 바라는 건 욕심일테니
그 중간의 적당한 내가 되길 바랄 뿐
구OO
<제목 짓기> 코너를 잊고 산 지 어느덧 십수년. BGAWORKS를 접하게 된 건 마치 <돌아온 제목 짓기> 코너를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작가, 평론가, 미술비평가, 에디터 등 ‘나 미술 좀 안다’ 싶은 사람들이 사진 5장을 보고 제목과 해석을 단다. 학창 시절 제목 짓기가 이차 방정식 수준의 중학교 수학이라면, BGAWORKS는 미적분 쯤 되려나. 사진 수가 5배로 늘었고, 각각의 설명까지 작성해야 하니 훨씬 까다로운 셈법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SO
사실 이 컴필레이션 자체가 이미 일종의 감상문이기 때문에 감상문에 대한 감상을 구체적으로 적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 컴필레이션(<몇 시 인가요>)을 읽고 느낀 한 가지는, 내가 왜 디오라마를 좋아하는지 이제 말로 정리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운동성을 잡아 가둔 정적인 가상의 세계라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흥미로워 보인다.
김JO
‘마치 접지 않은 색종이의 뒷면과 앞면 사이에서 새로운 모양을 상상하는 마음. 몇 가지 다짐으로 힘주어 접는 부분이 내년 이맘때 쯤 종이배가 될 지, 비행기가 될 지, 구겨버린 연습이 될 지 상상한다.’ 양면색종이 컴필레이션에서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담은 그림들이다. (후략)
성OO
‘사람들은 저마다 미술 작품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문장이 ‘미술 작품은 일종의 심리 검사지’라는 참신한 문장으로 변환될 수 있다니. 글 쓰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그의 검사 결과를 읽어본다. (김이녁 에디터의 <열린 결말>에 관해)
최OO
내가 선택한 컴필레이션은 ‘버티기 위해 부딪히는 것들에 관하여’이다. 컴필레이션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일상적이지만 개개인의 일상에서 충분히 마주할 수 있는 철학적 순간을 담은 작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근데, 나는 왜 대부분의 작품 감상을 나에게 이입해서 (혹은 나의 경험들을 비추어) 보게되는지 모르겠다.
OO
<여자와 배의 꿈에 관하여> – 전병구
‘해먹’은 나에게 여유로움의 상징물과도 같았다. 전병구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자는 마치 해먹에 얹혀있는 것 같이 불편하게 누워있는 기분을 들게 한다. … 이 부분이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어떻게든 기어코 누워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누워있는 게 평화로운 것인지.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고민했다는 작가의 의도는, 최근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연예인의 자살 소식으로 직장 동료들과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한 내용들을 상기시켰다.
컴필레이션 A
박OO
#찍는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스티글리츠<조지아 오키프의 손>
호감이 사랑으로 막 번져나가기 시작하는 순간에, 가장 민감해지는 인간의 신체부위는 어디일까.
아마도, 손일 것이다.(…)손은, 가장 정확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대변한다. 가볍게 포개는 것만으로도, 맞잡는 것만으로도, 가만가만 어루만지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이 손은 아마 많은 이들에게 그들 인생의 ‘손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잡아보기를 원했고 끝내 잡았던, 혹은 잡아보기를 원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던 수많은 손들을.
손OO
#어쩌면 이건 반사경
(…)“제가 찍은 사진들은 제가 그 앞에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후에 다시 펼쳐 볼 때는 오랜만에 열어본 서랍마냥 이런 방식과 맞닿아 있을 것 같습니다.”(…)
스티글리츠<조지아 오키프의 손>
(…)모두가 바라보는 것이 비슷하면 재미 없으니깐. 인물사진을 찍는데 누가 손만 찍겠어요? 하지만 손과 뒤의 단추만 있어도 충분히 멋진 순간이에요. 둘 사이에 어떤일이 있었는지 모르더라도 스티클리츠는 분명 저 순간 저 장면에 강렬히 끌렷을 거에요.
박SO
#시간은 벌써?
시간은 부유하다 스러진다. 걸음을 내디뎌 왔던 계단의 수 만큼, 시간도 쌓였으리라 기대했다만. 돌아봤더니, 비석 서너 개만 비스듬히 꽂혀있을 줄이야.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애도, 타인이 앗아간 시간에 대한 애통, 타인과의 관계 속에 파묻어버린 그 시간을 기리며.
전현선<뿔과 빛나는 돌>
기억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하루하루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날들은 차곡차곡 쌓이는 듯 싶지만. 기록되지 않는 날들은 기억 속에서 뒤죽박죽 엉키고, 기억은 시간의 짙음과 깊이에 따라 재배치된다.(같은 세상을 바라보더라도 나와 너의 현실은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상이한 화면을 엮어 보여주어도 화면의 경계 밖에서 어정거리다 마음에 뿔을 심는다. 그렇게 뾰족뾰족해진 시간 뒤로 뒷걸음칠 수 없다.(…)
컴필레이션 B
김Mㅇ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냐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냐.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않으려고 한다. 진실은 모르는 거니까. 표면에 드러난 모습이 전부는 아니니까. 근데 사람들은 일부의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 판단하며 추측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린다.(…)
방OO
이승주<정직한 검은 땅>
(…)먹으로만 그린 이 무채색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치 눈을 감고 떠오른 마음의 손이 잡스러운 생각 부스러기와 편린들을 치워내고 텅 빈 공간을 창출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치 비오는 날 차 앞유리의 와이퍼가 물기를 시야에서 깔끔하게 밀어내듯 방속 조정화면 같이 지직거리는 머리 속을 손으로 밀어내며 여백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명상이 아닐까.(…)
김OO
그림 속의 손은 과하지 않다. 정직한 손이다. 손으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비옥한 것을 찾아낸 것 같다. 두 손을 함께 이용해서 몸을 움직여 찾아낸 기쁨이 느껴진다. 그리고 서둘러 움켜쥐지 않는다. 그래서 더 축하해주고 싶다.
(다시 방OO)
빈센트 반 고흐 <Shoes>
이미 닳도록 신은 누군가의 신발. 내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맨날 끌고 다니는 내 육신, 내 외관의 모습도 저 신발과 같은게 아닐까. 네 겉모습으로 내 혼의 모습을 추측하는 일은 그림 속 신발을 보며 신발의 주인을 그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류OO
“누구의 초상화인가”
발은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발은 우리 행동력의 원천이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발이 없다면 우리의 일생의 대부분은 일종의 상념과 사색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신발이 있다.
컴필레이션 C
김JO
#변두리의 목소리
“나는 살면서 두군데의 난민촌에 가보았다. (…)그 두 난민촌을 방문한 뒤로 깨닫게 된ㄴ 것들, 그 경험이후로 바뀐 생각들이 이 작품들을 보며 떠올랐다. 그것은 변두리의 목소리였다.”
(…)
나는 망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미디어와 권력이 가려서 볼 수 없었던 모습, 망 밖에서의 모습이 아닌, 예상보다 훨씬 더 컬러풀한 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망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들이었다. 망은 그들의 모습을 가리고 조각조각내어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남긴다.
장OO
#누적된 욕망들
(…)누적된 욕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럼에도 적혀있는 글씨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항목 하나를 지우고 나면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참을 헤메이게 된다. 예를 들면 ‘잠깐 눕고 싶다’, 더 구체적으로는 ‘따뜻한 여름날의 모래사장에 몸을 파묻고 싶다’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가 다시 마음에 구겨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동완, <900x no.6 데칼코마니 라이프>
매일 다른 옷을 입는데도 늘 한결같아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옷장을 들여다 보고 싶다. 서로 다른 색상, 무늬, 소맷단의 길이, 목 둘레의 모양, 가까이서 보면 이질적인 모양들이 일단 옷걸이에 차곡차곡 걸리고 나면 묘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유OO
#400번의 구타
<400번의 구타>에서 트뤼포는 왜 꼭 주인공을 바다로 보냈어야 했을까? 무책임하게도 나는 그 이유를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봄날은 간다>에서처럼 동해 바다에서 찍은 장면은 꼭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김JO
#제어
무언가를 제어한다는 것.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건, 계획이건, 내 생각이건 내가 의도한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건 확실히 어마어마한 쾌감을 불러다주며, 그래서 누구나 제어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제어로서 만든 규칙(혹은 반복), 그에따라 만들어진 반복(혹은 규칙), 그러나 그 안에 완벽히 제어되지 않는 것들이 작품에 녹여져 묘한 강박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