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은의 텍스트로 시작합니다.
박이소 작가가 빌리 조엘의 노래 “Honesty”를 번안해 부른 <정직성>.
“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때, 우리는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책을 읽고 박이소의 ‘정직성’이 떠올랐다. ‘정직성 정말 외로운 그말 혼탁한 이 세상에서 너무 듣기 힘든 말, 너에게 듣고픈 그 말.’ 존 버거는 첫 장에서 부터 기존 비평의 우아한 언어들을 걷어찬다. 예술의 신비화를 떨쳐내고 싶은, ‘정직성’을 외치는 광야의 한 비평가가 떠오른다.
프란스 할스의 작품에 대한 작품 비평에 관하여
조화로운 융합,
잊기 힘든 놀라운 콘트라스트,
딱 알맞는 굵기로 비할 데 없이 힘차게,
등등의 단어를 지적하는 존 버거는 한심하다는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대체 ‘유혹하다니’, 어떻게 ‘유혹한다’는 말인가. 그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말 아닌가. 이 작품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들이 할스 앞에서 포즈를 취했을 때 할스가 보았던 방식을 우리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 대한 존 버거의 비평은 탁월했다. 그리고 최근 한 작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말하는데 영감이 되었다.
“그가 그려낸 그림에는 의례적인 탈락이나 왜곡이 없다. 그건 그의 선이 만드는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와 닮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대상을 관찰하는 방식이 그림에 반영된 것이다. 흔한 체계와 관습으로 빚어진 관점과는 거리가 있는 작가의 바라보기 방식은 그의 시선에 따라 화면 위에 그대로 옮겨진다. 보는 이가 그의 그림에 어떤 감흥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림의 관람자가 이런 작가의 세계를 공감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시각언어는 보통의 미술이 지향하는 앞과 뒤, 빛과 어두움을 흉내 내지 않아도 충분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런 작가의 예술적 표현에 관해 단순히 순진무구함이나 꾸밈없음 같은 단편적인 수사들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작가 특유의 표현력을 주류 미술사의 어떤 사조와 연관을 일으키는 것은 더욱 어색하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종종 나쁜 것보다 좋은 것에 대한 마땅한 이유를 찾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 (정은혜 그림을 보고; 무해한 선물, 송고은)
최근 나는 장애를 지닌 예술가들을 자주 만날 일이 생겼는데, 그들의 작품은 확실히 내가 ‘보고, 알고’ 있는 예술과는 달랐다. 분명히 좋은 느낌을 가졌지만 내가 배운 언어로 이들의 작품을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와중에 그들의 작업에 대해 누군가가 쓴 글 안에 ‘감동과 희망’은 나에게는 너무도 미심쩍은것으로 다가왔다. 나쁜 작품에 대해 글을 쓸 때보다 좋은 작품에 대해 쓸 때 더 자주 막막한 상황에 놓인다. 그 대상이 이미 많이 언급되었을 때는 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버거 역시 책의 마지막장에 렘브란트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을 때 그는 그가 비판한 글과 거의 비슷한 함정에 빠졌다. (*131p참조)
본 것에 대해 알고, 그것을 정직하고 생생하게 쓴다는 것, 그리고 그 문장들에 대한 책임이 꽤 무겁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 수록 더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