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거리 <해석에 반대한다> by 수전 손택 – 4번째 모임에서는, 이번 시즌 첫시간에 읽었던 [해석에 반대한다] 중 <해프닝, 급진적인 병치의 예술>(390p~) 파트와 <‘캠프’에 관한 단상>(408p~) 파트를 더 집중적으로 파헤치기로 합니다.
송고은의 노트.
“사람 살려!”
“물 한 잔만,”
“날 사랑해 줘”
미술관에서 마주쳤다면 다행이다. 예측불허의 모습으로 도심의 곳곳 심지어 나의 창문 밖에서 불현듯 마주쳤다면 얼마나 놀랍고 또 얼마나 경이로운 풍경이었을까? 수전이 기록한 그때의 ‘해프닝, 급진적인 병치의 예술’은 당시 공공연했던 하지만 여전히 정의되지 못한 예술의 어떤 형태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수전은 그 자신의 예민한 감각으로 수집한 해프닝에 대한 여러 면모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 해프닝은 돈으로 살 수 없다.
- 해프닝은 박물관 개념- 길이 보존되고 간직될 물건을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라는 개념 – 의 예술에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 해프닝은 꿑남과 동시에 파괴되고 그 뒤에 절대 재활용되거나 다시공연되는 법이 없다.
- 해프닝에서는 소재, 그리고 소재들이 딱딱하거나 부드럽게, 혹은 더럽거나 깨끗하게 변화된 상태가 중요하다.
- 몇몇 사람들은 해프닝을 ‘화가들의 연극’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 말은 참여자 대다수가 화가라는 사실말고도, 이 장르를 일종의 움직이는 그림,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움직이는 콜라주’나 ‘움직이는 입체화’라고 불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우리는 해프닝 공연을 붙잡아둘 수 없으며, 단지 눈앞에서 위험학게 터져 대는 불꽃을 간직하듯 가슴에 간직할 수밖에 없다.
모든 당대 예술들이 그러하듯 해프닝 역시 1950년대 뉴욕의 화단과 그 후 지속된 혁신적인 추동들의 결과이다. 그리고 당시의 시도들은 여기, 2020년의 서울의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캔버스를 벗어난 환경, 여러 매체의 콜라주, 온갖 재료의 부스러기들을 모은 상태, 결국 ‘대체로 너절한 모습’ 등은)온전히 이해 될 수 없어도 (불행히도)이젠 받아드려야하는 우리 시대 미술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이들의 이런 빗나간? 시도들을 다시 살피는 것은 꽤 유효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숨쉬는 바로 이 공기 그 내부에 담고 있는 것’을 흩어보는 일이고 “현대 문명에서 버려진 것, 공허한 것, 시대에 뒤떨어진것을 재치있게 향유한 벙법을 상기시켜준다.
오늘 우리 시대의 캠프는 무엇일까?
당시 뉴욕의 모습
Happening de Jim Dine Claes Oldenburg in Allan Kaprow’s The big laugh 1960
A performance of expressionist theatre known as “Happening,” in which a man in a paint-splattered suit plays dead while two other men examine his teeth and hair.
박재용의 노트.
영문 위키피디아 “Notes on “Camp”” 항목에서 인용. (접속일 2020년 8월 1일)
Christopher Isherwood is mentioned in Sontag’s essay: “Apart from a lazy two-page sketch in Christopher Isherwood’s novel The World in the Evening (1954), [camp] has hardly broken into print.”[6] In Isherwood’s novel two characters are discussing the meaning of camp, both High and Low. Stephen Monk, the protagonist, says:
You thought it meant a swishy little boy with peroxided hair, dressed in a picture hat and a feather boa, pretending to be Marlene Dietrich? Yes, in queer circles they call that camping. … You can call [it] Low Camp…High Camp is the whole emotional basis for ballet, for example, and of course of baroque art … High Camp always has an underlying seriousness. You can’t camp about something you don’t take seriously. You’re not making fun of it, you’re making fun out of it. You’re expressing what’s basically serious to you in terms of fun and artifice and elegance. Baroque art is basically camp about religion. The ballet is camp about love …[7]
Then examples are given: Mozart, El Greco and Dostoevsky are camp; Beethoven, Flaubert and Rembrandt are not.[8]
* 각주 7, 8번의 출처는 Isherwood, Christopher. The World in the Evening.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2 p. 10 ISBN 9780099561149
아주 거칠고 짧게 요약하자면, ‘고오급 캠프’는 ‘진심으로 진지한 병맛’과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거친 요약임을 핑계로, ‘병맛’이라는 문제적 단어를 사용 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Christopher Isherwood의 책을 읽지 못한 상태이기에 아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모차르트, 엘 그레코, 도스토예프스키는 캠프이고 베토벤, 플로베르, 렘브란트가 캠프가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진지한, 순도 100%의 괴상함’ 여부가 캠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르는 어떤 기준선이 아니었을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그렇다면, 지금의 캠프는 – 일종의 ‘기믹’과 같은 장치나 태도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괴상한, 심지어 탁월하기 까지한 것 – 은 무엇일까? 혹은, 21세기는 ‘캠프하다campy’는 말을 비롯해 모든 판단이 유효성을 상실한 시기라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포스트모던…을 들먹이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한편, 오늘날의 급진적 병치의 예술 혹은 해프닝에 해당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 제도화된 언어에 포착되지 않은, 심지어 아직 예술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은, 그러나 예술적 의식을 갖추고 이뤄지는 어떤 행위가 있을까?
처음 활자화 된 지 반 세기 이상 지났음에도 여전히 현재적으로 느껴지는 손택의 글은 20세기 중반의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이라는 곳에서 쓰여졌음을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가 글에서 활용한 문제의식을 차용해 지금 이곳(2020년 서울)을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여러분과 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
생각할 거리
1. ‘캠프’? Campy? 이게… 뭐죠? (개념과 사례, 개인적 경험, 2020년 시점에서의 생각 공유)
2. 해프닝…? 이건 또 뭐죠…? (위와 마찬가지)
3. 나에게 (현대) 미술은 무엇인가.
멤버들의 독서노트 (to be updated)
영화의 컬트적 인기는 주인공인 존윅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잘’ 죽이기 때문에 나온다. (중략) 이 영화의 기초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때마다 팬들이 할 말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존윅은 한 명을 더 죽입니다.’ 뿐이다.
– HOO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영웅본색2 생각이 나네요.” – LOO
“캠프와 키치, 핫함과 힙함”
(중략) 키치라는 것은 고급 문화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다. (중략) 반면 캠프는 일종의 스타일인데, 캠프를 향유하는 계층은 자기들이 추구하고 즐기려는 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 LOO
“손택이 캠프를 묘사할 때 “다정다감한 감정” 그리고 “일종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봐선 대상에 대한 애정이 차이인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 SOO
뭔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도덕과 종교와 성실한 노동, 저축 등에 배반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황당함은 아방가르드나 해프닝에서 공연되는 것들을 넘어섰을 거다.
그래서 나는 이런 해프닝을 그 당시 사람들처럼 즐기기 어려울 거라 믿는다.
– OOO (놀러가기)
해프닝을 통해, 우리가 미술 감상이라고 하는 것들(캔버스, 조형 등)에 대해 미술관은 무엇까지 미술 작품이라고 범주화하는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중략)
나는 캠프에 관한 단상이 21세기 밀레니얼 세대의 일반적인 행동양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또한 킴 카다시안이 왜 떠오를까? 이유: 부자연스러우며 과장된 화장과 바디 쉐입.
– OO최
(위 이미지는 “camp”를 주제로 했던 201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갈라 참여자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해프닝은 우리가 잘 알듯 퍼포먼스 아트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요즘 영화를 보며 왜 많은 영화들이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폭력적인 방식을 택하는지 궁금했는데 손택의 비평을 읽으니 이해가 되었다.
(중략)
반면에 ‘캠프’란 무엇인지 아직 잘 감이 오지 않는다. 부자연스럽고 과장된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언캐니’의 미학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게 맞을까요 클럽장님?!)
– MOO (놀러가기)
(캠프와 언캐니는 좀 달라요. 모임에서 말씀드릴게요!)
해프닝은 이름처럼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이야기가 없고 나열된 소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극보다 그림에 가깝다는 해프닝의 급진적 병치 기법이 인습적인 의미를 깨부수고, 새로운 의미나 반의미를 창조한다고 한다.
– ㄱOO
(‘급진적’과 ‘병치’에 방점을 찍어 생각해봅시다.)
현대의 예술과 문화는 점점 전문화되고 어려워진다. 우리 시대에 예술에 통달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이나 공학에 통달하기 까지의 어려움에 견줄만큼 오랜기간 고되게 감수성을 양성해야만 한다고 손택은 말한다. (p. 441)
(중략)
손택은 우리가 문화의 충돌이라 부르는 것은 충돌과 갈등, 퇴보가 아닌 새로운 감수성이 탄생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 김OO
“캠프”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떠올린 건 다름아닌 “밈(meme)”이었다. (중략) “끔찍하기 때문에 좋다”라 말하는 캠프적 감성은 이미 일반적인 것 같다.
김복희: 나는 감정과 감정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맥락과 맥락 사이가 최대한 멀 때 시라고 느껴. 너무 가깝고 촘촘하면 시보다는 다른 장르의 글에 더 가깝게 느껴지고 말이야. 문장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내 다리가 찢어지도록 스트레치를 시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 팔을 뻗게 해주는 희열이 좋아요. 그런 걸 주는 시가 좋아요. 나를 좀 일하게 하는 시. 나를 노동하게 하는 시.
이 글에서 시를 미술로 바꿔읽으면 어떨까?
– ㅅOO
일단, 나는 ‘캠프’를 어떤 가상의 인간상으로 이해했다.
(중략)
그리하여 그가 만들어낸 것은 세련된 껍데기에 그렇지 못한 알맹이를 가졌다.
그러나 또 그게, 아무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어서 주목을 받는다.
자신의 작업을 ‘기행’으로 폄훼하거나 매도하는 자들에 대해선 크게 관심이 없으며, 타격을 받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너무도 진지하기 때문에!
(중략)
우리가 각자 이해한 ‘캠프’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번 모임에선 <2020ver ‘캠프’ 케이스 찾기 경진대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 ㅂOO
유머는 본질을 통찰하는 지성의 산물이고, 농담은 비슷하게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끼리의 교감을 통해서만 성립이 가능하다. 무딘 감수성으로 하는 농담은 대체로 ‘빻은’ 농담이 되지만 가끔 언피씨한 이야기조차도 맥락을 ‘찐으로’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제대로 된 킥이 될 수도 있다. 이 전제에서 출발하여 camp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그려내는 happening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M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