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 이미지는 이 책의 영문판 표지입니다. 원제는 “Keeping an Eye Open: Essays on Art” 입니다. 직역하면 “눈을 활짝 뜨고 보기: 미술 에세이 모음”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해요.
송고은
1.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번역과 해석이 아닐까? 실패를 예언하면서도 이를 놓지 못하는 건 누구나 내안에 세계를 잘 읽어주고 심지어는 의미를 찾아주는 존재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줄리언 반스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용감하고 또 무모하다. 제리코, 들라크루아, 쿠르베, 세잔, 그리고 드가와 브라크 (하물며) 프로이트의 언어와 이미지에 스스로의 온전한 해석과 번역을 나란히 놓는 다는 것은 보통의 열정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역시 앞선 예언들을 빗겨가긴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그는 이 대상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있으며, 그의 문장들은 너무도 매력적이란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그가 소설가로서 키워온 도발적인 상상력과 질문, 묘한 여운을 남기는 대답들을 발견할 수 있다.
139p.
“오늘날의 관람객은 루이코르다, 자카리 아스트뤼크, 오토 숄데러,(…)아르튀르 부아조, 앙투안 라스쿠 같은 이들에게 슬쩍 한번 연민의 눈길을 보낼 뿐, 그 이상 관심을 두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 연민의 마음에 딱히 죄의식은 아닌, 불편한 감정이 섞여 있다. 우리가 그들을 잊어버린 후대라서 그렇다.”
147p.
바지유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무른 이렇다”라고 말하는 반면, 팡탱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화가의 생활이란 때로는 하찮은 결과를 낳는 수고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불안이 고조되고 자신감은 사라지는 생활이다.
159p
“미술가들은 늘 배움에 굶주리며, 미술은 스스로를 삼켜버리기 마련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이런 문장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물론, 뒷편에 실린 론 뮤익과 올덴버그에 대한 그의 단상들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 역시 “미술이 어떻게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서술에 비춰보아 그의 전공은 19세기 프랑스 회화사인것 같다 ) 종종 문학가들이 묘사하는 미술가와 그들의 삶이 너무나 극적으로 느껴졌다면 적어도 반스의 해석은 충분히 즐길 만한 것이었다.
2. ‘엉클 폴’의 그림들
반스는 그의 노스텔지어가 담긴 그림들을 어린시절 자신의 집에 걸려 있던 ‘엉클 폴’의 그림에서 찾는다.(그가 현대미술가보다 인상주의 화풍의 작가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이 그림 엽서는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가 엉클 폴의 그림을 언급할 때 나 역시 떠오르는 한 그림있다. 가로 세로 1m가 조금 넘는 직사각형의 옅은 나무색 프레임을 한 동양화 풍의 추상화였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가는 좁은 벽에 붙어있었는데 어릴 때는 거기서 기차와 마을 그리고 커다란 새 모양을 찾았던 것 같다. 나의 막내 삼촌이 그렸다는 사실 말고 아무도 그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시절의 그림이 지금 나 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3. ‘숨어서 듣는’ 명곡 같은…
누군가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본다면 한 번도 ‘피에르 보나르’를 언급하진 않았다. 그의 작품이 좋다고 말하기에(적어도 내가 속한 세계에서) 피카소의 언급처럼 – “감수성이 넘쳐서 좋아하지 말아야할 것을 좋아했다.”- 그는 너무나 ‘행복’한 것만 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이렇게 어디선가 툭 튀어나오면 그 ‘행복’감을 숨길 수는 없는 것 같다. 앙드레 지드의 충동적인 어리석음을 일으킨 그의 부슬부슬한 터치와 색감은 어쩌면 모더니즘을 향한 역사적 흐름보다 더 강력할 지도 모른다.
박재용
최근 발간된 미술잡지에 글을 한 편 게재하였습니다. “FOCUS”라는 섹션에는 총 다섯 편의 글이 실렸고, 각각의 글과 필자는 이렇습니다.
FOCUS
이배展, 윤형근展: 단순함, 그 너머 / 윤진섭
수평의 축展, 최윤展: 자연×레디메이드 / 현시원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展: 헤테로토피아의 대혼란 / 박재용
정서영展: 공기를 두드려서 / 장지한
박영숙展, 강홍구展: 초록 응달 / 김종길
목차를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건, “다섯 편의 글 가운데 여성 필자는 한 명 뿐인 걸?!” 이었어요.
기계적으로 필자 성비를 맞춰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어딘가, 뭔가 이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전 반스의 책을 읽으면서 줄곧 그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 예술맨들은 대체 뭐가 문제지!?”
참, 위의 사진은 스탠드업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입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해나 개즈비: 나의 더글라스”(링크)의 한 꼭지에서는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하는데요, 이를테면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대체 왜 여자들은 세 명씩 몰려다니면서 나체로 폼을 잡고 있는거죠?”
아. 중세 시절 각종 회화에 등장하는 나체의 여인 세 명은 ‘미의 삼 여신’ 입니다. 해나 개즈비는 “저 여자들은 목에 왜 쇠사슬을 걸고 있는 거죠?” “어머 제일 왼쪽의 저 여자좀 봐요. 손가락으로 어딜 가리키는 거죠?” 와 같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거의 (우리가 흔히 ‘그림’이라고 부르며 ‘미술’과 동일시하는) 회화 작업들입니다. 책의 상세한 내용과 별개로, 대부분의 작업들을 보며 제가 했던 생각은 ‘재현’의 문제였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예술과, 세계에 대한 재현을 벗어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변형하고자 하는 예술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문제 말입니다.
세계의 재현에 방점을 찍는 예술은, 궁극적으로는 체제순응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고착화하는데 복무하는 것일테니까요. (우리가 함께 읽은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이런 관점을 통해 바라볼 수도 있을까요?)
한편, 반스의 책은 제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예술’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10여 년 간 작업해온 예술이란 주로 (1)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2) 미래에는 바뀔지 모르는 판단을 내리며 (3) 예술의 정의를 갱신하는데 기여하고자 노력해온 셈이니까요.
질문
1. (원초적 ‘미술 경험’ 혹은 ‘작품’에 대한 질문) 여러분에게도 ‘엉클 폴’의 그림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것이였는지 그리고 그 이미지가 (혹은 경험이) 현재의 나에게 어떤 의미와 기억으로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2.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과 이에 대한 짧은 사적인 해석은?
3. 100년 뒤, 200년 뒤의 ‘미술관’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가 있게 될까요? 미래인의 관점에서, 그들이 기억하고, 수집해서, 전시하게 될 2000년대의 ‘예술’은 무엇일까요?
“작품을 너무도 복잡한 사조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바라보며 느끼는 것들은 참 새롭다. … 하지만 미술사 수업에서 새왔던 것처럼 그림을 자잘하게 나눠 구성요소별로 분석하기 보다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만 보기로 했다. … 그림을 보는 사람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림에서 그리고 잇는 그 상황대로 좋다는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대로가 좋아도 된다는.”
– YOK
쿠르베에 대한 구세계의 태도는 현대에도 보기 어려운 것은 아니어서 이해가 쉬웠지만, 반대로 쿠르베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게 좀 신기했다가, 앞에 계속해서 나온 자아도취적인 성격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본인의 행동이 가진 정치적 의미와 역학관계를 고려하기 보다 스스로의 역량을 바탕으로 옳은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시절 노년의 모습이 그러했던걸까 아니면 예술가의 특성인가 궁금해졌다. 아니면 후대의 살마들이 그게 아니었으면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텐데 하는 아쉬움에서 예술가의 노년을 더 안타깝게 그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들 말년에 고생을…
– HOO
…내 시선을 사로잡은 작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림보다는 작가의 인생이 좀 더 흥미로웠다. … 이렇게 사회적인 관습을 극복하려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레종 도뇌르 상을 보란듯이 거부하는 모습에서는 대쪽같은 모습보다는 어딘가 좀 좀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쿠르베의 그런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책에서 작가가 소개하는 미술가들은 대부분 19~20세기 프랑스 작가들이다. 어떤 연유로 이렇게 특정 시기의 특정 지역 작가만 소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정도의 해상력으로 서술했을 정도면…
…끊임없이 지적인 자극과 감동을 원하고 탐구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내가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책을 읽고, 미술관을 다니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공감이…
– LOS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도 묘하게 안 읽히는 문장과 내용, 하지만 멋진 글. 왜인지 곰곰히 생각하니까 은근 소설같은 면 때문인건가 싶었다. … 소설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우리 인생처럼. 그런 의미에서 확실히 이야기꾼의 미술 관람기 답다 싶었다.
…오랜만에 현대 미술이라 부르는 것들의 조금 전 작가들의 이야기를 보는 건 재미있었다. 아니 묘하게 그 자체로 현대미술답기도 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외려 난민 수용소에 가깝’다는 표현이 굉장히 와닿았다. 미술은 이러나 저러나 많은 것들을 포함해 나가며 당당하게 전진해 나가니깐. 요즘같이 표류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 SOO
“의외의 당신”
책을 읽으며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예술하는 남성들에게 결혼은 무엇인가’를 다룬 부분들이었다. … 한술 더 떠 아내는 필요한데 결혼은 하기 싫다는 🐕🐕🐕🐕🐕 소리도 등장한다. “결혼을 하는 순간, 비밀스러운 생각을 기록할 수도 없고 비밀스러운 모험담을 쓸 수도 없게 된다.” …역시, 예술하는 남성들(물론 전부는 아니다!)의 병적인 ‘자아 비대’ 증상에는 유구한 계보가 있구나.
– POO
POO 님의 추천 링크: “아름다운 뉴욕과 남루한 욕망” – 우디앨런에 대한 칼럼 (링크)
우디 앨런은 뉴욕을 와서 봐야만 뉴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눈을 통해 뉴욕을 중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막상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젊은 두 남녀의 시선인 척하지만 막상 조감되는 것은 나이 먹은 남자의 비루한 욕망이다. 때로 영화의 볼거리는 미끼용 눈속임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젊은 여자들은 나이 든 남자를 좋아하지”라고 투덜거리지만 이는 거꾸로 읽는 게 옳다. 그런 맥락에서, 재즈나 뉴욕은 남루한 욕망을 감추는 위장막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전 명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주 사적인 이유 6가지”
1. 조기 교육 부재
2. 지식의 부재
3. 머릿속에서 변해버린 예술의 정의
4. 작품 내부의 관계보다는 작품과 외부의 관계가 더 재미있다
5. 지적 쾌감의 부재
6. 경험적 요소
– KOㅎ
작가라는 직업이 필수적으로 부여된 임무가 아니었을진데 이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인 영향력을 뿜어내는 이 작품들은 결국 그 안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타인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상대적인가 하는 고민에도 빠져본다.
내 삶의 단상을 그 순간 절대적으로 몸소 체험하는 감정에 온전히 맡겨도 될까.
– HHO
어릴적에는 모네의 정원 그림을 (더) 좋아했다. 모네가 그린 정원을 보다보면 그림을 잘 모르는 나도 아름다움과 따스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잔의 정물화들을 보면서 들었던 질문은 – 왜 탁자가 삐뚤어져있을까? 왜 아름답지 않은 사과를 그렸을까? 세잔은 정물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줄리언 반스를 읽으며 어릴 적 생각들이 조금 정리가 되었다.
– SOC
이 책에 끌린 이유는 작가들의 이면과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KOO
나에게 있어, 미술은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서 혹은 크리에이티브함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보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미술은 비극도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예전 미술 관람에서 전쟁 종류 묘사는 지나쳤던 사람) 보통 사람의 공감 능력 혹은 감정 지능은 소설이나 글을 읽으면서 발전된다고 한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미술 작품을 통해서도 타인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작게나마 같이 느끼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 CHO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이후 소설가의 미술 이야기에 대한 거부감이 생겨버린 걸까. …이 책은 얼마나 사적인 이야기인지 제목에도 줄리언 반스라는 저자의 이름이 들어간다. …서점에서 대충 훑고 받은 느낌은, ‘아, 역시 너무 사적일 것 같다.’
– KOO
줄리언 반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드가가 그림 속의 여자를 아름답게 그리지 않기에 드가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일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런 평가를 말한 그 사람들이 여성을 타자화하는, 여성혐오적인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특별히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고 그럴 필요 또한 없다. 그들은 그저 본인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자들이 몸을 가꾸는 은밀한 장면이 그려진 그림’을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 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드가는 그림 속의 그들을 아름답게 꾸며 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다만 인간으로 존중하여 그린 것에 가까우며, 여자들은 더 예민하게 그러한 점을 캐치한 것이리라.
… 사람들은 남자를 사람으로 과잉 대표하는 경향이 있다.
– MOO
“미로”
출구로 향하는 길이 있다는 가정 하에 미로를 탈출하는 방법은 오른쪽 벽을 따라 걷는 것이다. 미술을 취향으로 삼기로 했다면, 그건 미로에서 출구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미술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미학, 철학, 도상학, 미술사 등 복합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로에 처음 들어선 순간은 이중섭의 <황소>를 마주쳤을 때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였을 뿐이지만 한순간에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나는 이 모임에 참석한 당신과 마찬가지로 미로 속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