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적campy”인가요?
[미술아냥]의 10번째 시즌, 박재용-송고은의 더블 클럽장 모드로 태세를 전환한 이후로는 3번째 시즌인 2020년 5월~8월 시즌의 첫 번째 책은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1966/2002)입니다. 영어판은 1966년에 발간되었고, 한국어 번역은 2002년에 출간되어 8쇄(2013년 기준)에 이르렀습니다.
60년대 말까지 깊은 우정을 나눈 미술가 폴 텍Paul Thek을 향한 한 마디 헌사로 시작하는 이 책은 꽤 두껍고,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와 작품을” 갖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짐짓 가벼운 어투로 쓰여진 [미술아냥] 소개 멘트에 따라 클럽에 멤버로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 송고은-박재용 두 클럽장이 첫 번째 책으로 야심차게 선정했으니만큼 즐거운 독서였기를 바랍니다.
첫 모임이니만큼, 서로에 대해서 소개하고 알아가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은 아래와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모임의 흐름
- Pre-모임: 아트선재센터, 남화연 개인전 <마음의 흐름> &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장종완 개인전 <프롬프터> 관람
- 가능하면, 모임 전 발제 포스팅을 읽고 와주세요!
- 클럽-클럽장-파트너 소개
- 모임 시작 후 첫 모임의 루틴에 따라, 자기소개 진행. 소개 시, 지난 1~2달 사이의 “미술생활”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쉬는 시간?)
- 책 전반에 대한 인상, 의견 공유
- 생각할 거리 함께 살펴보기
- 각자의 독서노트에서 인용한 부분을 소리내어 읽고, 질문과 의견 교환, 토론
- 마무리 발언 – 다음 모임에 읽고픈 책에 대한 의견 환영
- 기록 사진 남기기
- 모임 마무리 & 가능한 사람들은 식사?
송고은의 메모
Sontag에 따르면, 진정한 비평이란 예술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비평이다. 진정한 해석과 비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Sontag은 ‘예술의 성애학’을 제시했다.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었는지를 그 자체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Sontag, 2002: 34)’을 배워야 할 것을 제시했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 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다.
그러므로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 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 이다(Sontag, 2002: 34-35) 예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서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Sontag은 투명 성에 대해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 는 것(Sontag, 2002: 33)’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탁의 관점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예술작품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며,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러한 역할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여 감상의 폭을 제한하는 건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틀을 통해 그들 이 보다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손탁이 제시한 기준은 여전히 모호하고, 그가 말한 투명성과 몰입의 과정은 매우 주관적이다. 과연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Sontag, 2002: 34)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여러분이 작품을 해석할 때 쓰고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덧붙여, 해석학에 대한 짧은 정리:
해석학의 논의에서 해석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크게는 1. 작가 중심 2.예술작품 중심 3.감상자 중심 등이 있다.
첫째, 작가 중심은 말 그대로 작품해석의 기준을 작가의 의도에 둔다. 작품을 볼 때 창작 의도를 분 석하는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문화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왜 이러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각 이미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샅샅이 파헤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가장 일반인 방식이다.
둘째, 예술작품 중심은 작품해석의 기준을 예술작품 자체에 두는 입장이다. “ 작품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감상자들은 작품이 건네는 말에 대답해서 그 속으로 들 어가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해석 방식은 작가 중심의 해석 방식에 비해 보다 다양한 해 석이 가능하지만, 해석이 기준이 모호하다는 한계를 갖는다.
셋째, 이러한 애매모호함에서 나온 입장이 감상자 중심의 해석 방식이다. 작품 해석의 기준이 바로 감상자에게 달려 있 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감상자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해석이 매우 다양해진 다. 그러나 이 역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 작가와 일반인의 구분, 진품과 위작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직면하게 된다.
(위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였다. 최은영, 이병준. “미술관교육에서의 해석의 문제에 대한 탐구 : S. Sontag의 감성학 논의를 기반으로”, 문화예술교육연구 14:5 (2019), pp. 103-120)
박재용의 메모
손택의 글과 생각을 접한 것은 20대 초, 제대로 이해를 하는지도 모르고 온갖 이론 에세이나 글을 읽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접한 글이 “캠프에 관하여On Camp”였고, 아마 한글이 아니라 영어로 읽었던 것 같아요.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알듯말듯 하다고 느꼈죠.
맥락을 조금 덧붙이면, (지금은 없어진) 당시 대학로의 시네마테크 “하이퍼텍 나다”에는 극장 좌석에 별별 문화계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시절 저의 멘털리티는 ‘지금은 관객 회원이지만 언젠가 나도 이름을 새긴 좌석을 하나 기부하고 말겠다’는 꿈을 품은 그런 상태였습니다. 홍대 앞 대안공간과 클럽, 신촌 인근의 몇몇 공간들 – 요즘고는 좀 다른 느낌의 인사동 – 서울시네마테크 인근을 배회하는 20대 예술 애호가 꿈나무이자, 왠지 장차 대학원생이 되고 말 것 같은 (하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될 지 모르는) 사람이랄까요?
아는 것보다는 알고 싶은 게 더 많은 상태였습니다. (장차 미술과 관련한 일을 할 거라거나, 연구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원에 진학을 하거나, 심지어 미술/예술에 대해 진지한 비학술적 글을 쓰게 될 거라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 별다른 철학적, 경험적 바탕 없이 접한 손탁의 글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글이 60년대의 미국, 그것도 뉴욕에서 쓰여졌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요.
트레바리 모임을 위해 다시 읽어보는 손탁의 글은 즐거움 그 자체입니다. 십 수년 전에는 안대를 끼고 엄지장갑을 낀 채 코끼리를 더듬었다면, 이제는 커피를 한 잔 내려 홀짝이며 카우치에 몸을 기댄 채 벽난로 가에 앉아 80인치 4K 화면으로 눈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이 책은 여러 매체에 손택이 기고한 글을 모은 앤솔로지입니다. 책을 읽으며, 새삼 그의 글이 단호하면서도 논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글 안에서 논리를 구축하는 벽돌을 쌓고 공간을 직조하는 기술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혹은, 하나의 명제를 과감히 제시한 뒤 차분히 논리를 전개하는 흐름을 마치 재미난 미드 한 시즌을 따라가듯 쫓아가보게도 됩니다.
물론, 손택의 글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밝히는 바, 당초 글을 작성하고 기고한 뒤 책으로 나온 – 불과 10년이 되지 않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도 스스로의 의견에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의 의견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단호하고 논쟁적인 어투로 – 단조로운 비난이나 선동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 자신의 의견을 글로써 제시한 것은 큰 용기를 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재미삼아, 한 번 쯤은 그의 ‘스타일’에 따라 의견을 전개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함께 생각해볼 것들
- 여러분의 (현대)미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현대 혹은 동시대) 미술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 사람, 장소, 이미지가 있나요? 왜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되나요?
- 미술 작품을 관람, 감상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작품이나 전시를 ‘해석’하려 애쓰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그러한 ‘해석’의 과정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나요?
- 좋아하는 작품이나 전시, 작가가 있다면 간략히 소개해줄 수 있어요? 혹은, 이런 것도 미술인가!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면 알려줄 수 있어요?
멤버들의 독서노트 인용
성경과 설교를 열심히 읽고 듣던 시절, 대부분의 설교에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 가득했다. 문맥과 상관없이 토막내 인용된 구절에 자신의 의도를 담았다. 신약성서에서 구약성서를 인용하는 방법도 이를 닮았다. 그래서 말이 안되는 해석을 반박할 근거를 찾기 어려웠다.
– ㅇOㅈ (놀러가기)
과학에서는 내가 무엇을 믿거나 지지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이 자연법칙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 그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고 현대의 예술은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런 측면에서, 예술을 볼 때 작품을 분해해서 법칙적인 의미를 찾는 행위인 ‘해석’을 지양하고 좀 더 감각적인 부분에 집중하자는 저자의 관점은 공감가는 바가 많았습니다. (중략) 모임에서는 예술을 보는 관점에 대해 같이 더 이야기를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OㅎO
“예행 연습”
…이 말인 즉 저에게 그동안 예술은 대단한 전문가로부터 유의미한 해석을 받아낸 작품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에 따라 저마다의 세계관이 이입될 수 있는 도화지 같은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 이 책에서 주창하는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 실로 더 마음으로 와닿았습니다.
– KOK
그림이란 내가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이란 거울과 비슷하다. 그림은 이미 내가 아는 것들이나 경험한 것들이 투영되어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내가 아는 것이 많을 수록, 경험한 것이 많을 수록 더 깊이 그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ㅅOO
해석한다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여겨지는 세태를 비판하는데 중점을 뒀다기 보다는 해석하기 위한 사고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예술의 순수한 의미, 다양한 감정이 부정되고 버려짐을 안타깝게 여긴 지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 ㅂOㅇ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예술은 언제나 나에게 분석의 수단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미술사 수업에서 들었던 고전 양식들에 대한 지식을 끼워맞춰야 했던 나에게 영화 또한 분석의 대상이었으며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 했다. … 이 클럽과 이 책을 택한 이유는 최근 들어 바뀌기 시작한 나의 예술 그리고 영화에 대한 생각을 이 책이 뒷받침해줄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었다. (중략) 고다르의… 영화는 여전히 나에게 물음표만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도 된다고, 그 물음표를 띄우는 순간마저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 OOㄱ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보았다. … 영화를 본 후 느낌은 어떻게 운을 떼야 할 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비선형을 그리는 모호한 영화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영화 내내 드러나는 메시지는 단 하나, 본인의 영화가 하나의 의미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너무 싫다는 것. (중략)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을 하며 해석의 여지를 개인에게 남겨둔 답변이 오히려 지금은 멋있게 다가온다.
* ‘해석을 반대한다’에서 예술의 도덕성을 따지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부분은 여전히 이해가 어렵다.
– OㅈO
미술은 왜인지 접하기 어렵고 해석을 위해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작가 개인의 인생사도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의무교육의 폐해랄까.) 배경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작품을 통해서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 뒤로 미술 감상 도 나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통로라는 생각을했다.
– ㅎOO
나는 이따금씩 작품보다는 캡션에만 집중하고 마는 때가있었다. (중략) 손택이 말하는 해석은 미술에 있어서 더 악영향을 끼친 것 같다.
– ㄱㅇO
정우철 도슨트 (중략) 물론 내 스스로 작품을 보는 힘이 있어서 예술작품을 그대로 본다면 좋겠지만, 서서히 미술작품 감상에 흥미를 붙여가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그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있으면 그에 대해 더 깊게 빠져드는 것이 사실이다.
– OSO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젊은 애들이 깨벗고 뛰어다니는 영상들(보통 깨벗고 뛰어다니거나 피가 튀거나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한다… 도대체 왜죠?)을 보고 있으면 의미나 상징같은 것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맘에 드는 것을 한참동안 그냥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 좋다. 주제는 뭐 대충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 소외 아니면 본인의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아노미를 표현한 거겠지 뭐. 현대미술 대-애충 다 그런거 아닌가?
– OㅅO
‘이건 뭐지? 이 묘하게 아름다운 투머치는 뭐지?’ (중략) 분명 우주복같은 복장에 문신을 한 듯한 헤어라인과 아이라인을 보곤 해괴하다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그의 외적인 모습에 힘 입어 ‘김봉남’이라는 그의 본명을 들었을 때 더욱 깔깔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깨달았을 땐,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의 취향을 고집하는 용기와 몇 십년간 지속된 그의 일관성에 경의가 표해졌다. ‘앙드레 김’이라말로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며 과장된, 죽도록 순수하고 진지한 캠프 그 자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OㅈO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텍스트의 함정에 함몰된 이후로 나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구조적이고 분석적으로 변했다.
– OㅇO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시대마다 변화하는 기준이었다. …나는 무엇을 쫓아 살아야하는 것인가. …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작가는 예술작품에 대한 독자의 애정어린 감수성이 곧 해석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 시간을 거쳐 성장하는 내 안에서 상대적으로 변화하는 가치관과 평가로 그 순간의 절대적인 기준을 삼겠다.
– OㅎO
…그런데 애초에 나는 비평하는 글을 읽은지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조금만 읽어 메타비평까지 해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상태라고 느낀다. 음 맞아 이런 해석은 해롭지 또는 아 요즘엔 그래도 저런 글 잘 안나오지 하려면 충분히 읽었어야 할텐데… (중략)
쓰고보니 고이즈미 신지로가 떠올랐는데, 이 사람이 캠프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이 된다. 확실히 끔찍하고 모두다 끔찍하기 때문에 좋아하는데다가 당사자는 진지하다는 점까지 예선은 통과한 것 같다.
– OㅅO
“예술에 대한 강박이 예술을 통째로 집어삼킬 때”
강의를 마치며, 감독님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롯이 혼자만의 상념으로 채워보세요. (중략) 혼자만의 감상을 누려보세요. 가능하다면 조용히 생각을 정리해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두서 없어도 괜찮아요. 남들의 해석이 당신의 감상을 해치지 않게 말입니다.” (중략) 각인처럼 선명하게 남은 건, 딱 저 한 마디다.
– ㅂOㅇ
그런 의미로 예술작품에서 의미를 쥐어 짜내는 것은 옳지 않으며 우리의 임무는 그런 해석이 담긴 내용을 더 쳐내서 본질을 읽어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그동안 잊고 있던) 예술을 온전히 감상할 때 취해야 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경각심을 주었다.
– ㅁOㅇ
나는 이런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하는 인간들의 성향이 앞으로 더 심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마치 인간들이 기술의 발달을 문제가 있어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사실 해석은 보험과도 같다. 보험은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도구다. …해석은 불확실성을 줄여준다. 하지만 해석은 다양성을 줄이고 획일화 시킨다. 타자를 범주화하고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폭력이 아닌가? 그래서 해석의 기본 성질은 폭력적이다.
– OOㅎ
“난 해석은 믿지 않아.”
… 그러고 보니 좋은 영화는 꼭 의미 있는 장면과 대사, 줄거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줄거리 상으로는 필요 없는데 가끔 알 수 없이 아름답고 좋은 순간들이 있고, 그 자체가 영화를 더 풍부하게 느껴지게 했다. 손택이 말하는 스타일이란 이런 것일까?
– Oㅎ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