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의 책을 읽으며 표시해둔 부분을 타이핑한 것을 먼저 써 봅니다 (스킵하셔도 돼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신종 가난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간에 벌어진 소비 격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9), 물질의 풍요, 인간의 가난 (36), 현대의 예언자인 정부 관료들은 이미 엄청난 예산을 이 예언 산업에 쏟아부었다 (41), 미래의 역사가는 전문가의 시대를 정치 소멸의 시대라 부를 것이다(55),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5), 이 시대에 여행이란 단체로 몰려다니며 낯선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의미했떤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5), 전통적인 직업인이 권력을 휘두르는 전문가로 변신한 것은 교회의 제도화 과정과 맞먹는다 (66),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스스로 정의하고 만족하는 대신 교육된 필요를 채워야 하는 이러한 지배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79),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환상을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82), 전문가들은 기술의 특성 가운데 관리자들에게 명백히 유리한 기술의 힘에 주목했다 (91), 소비자가 보살핌과 상품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면 할수록 그 권리는 기업과 전문가의 권리가 된다 (100), 일리치는 농경문화에서 산업사회로의 전 지구적 변화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21)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
순전히 선거용 선동인가, 아니면 시대의 조짐인가?(10), 따라서 루카치-프랑크푸르트 학파-사회주의 또는 야만-앙리 르페브르-상황주의 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시퀀스(이 시퀀스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가차 없고, 재생하기 어려운 비판의 계승을 일컫는다)가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공식적인 지성사에서 배제(그리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개인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되면서 알튀세르-부르디외-들뢰즈-푸코-데리다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퀀스가 등장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알랭 바디우가 이와 같은 목록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15), 우리는 흔히 이미지가 글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믿습니다만(54),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화면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경우 우뇌, 즉 감정을 관장하는 뇌가 반응을 보였을 뿐, 성찰이나 숙고를 담당하는 좌뇌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비판정신을 상실하는 거죠. 간접적인 빛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그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76), 따라서 요즘의 화면은 전자횃불인 셈이죠(79), 필요를 위한 필요(123), 그렇기 때문에 ‘성장 감소’ 사회라는 개념이 제기되는 겁니다 (128), 메시지가 아닌 조련이 있을 뿐(?), 최근 몇 년 사이에 의사현실pseudo-reality을 표방하는 광고들이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서 일종의 ‘메타현실Meta-Reality’처럼 뿌리내렸다. 사람들은 광고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자신들의 진짜 삶을 바라보기를 멈추었다(137) 누군가의 자유를 들먹거리는 것보다 그 사람을 확실하게 소외시키는 방법은 없다 (169), 기업들이 람보에 버금가는 연수 프러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1), 여성들은 여전히 세계 바본주의와 여성 선수들을 후원하는 브랜드들에 의해 한층 더 알뜰하게 착취당하고 있다 (222), “자신의 거주지가 아닌 곳으로 이동하여 최소한 사흘 이상 체류하는 것”(237), 세상살이 체험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250), 섹스관광객은 무엇보다 ‘보통남자’ 입니다 (286), 진정한 것에 대한 환상이 낳은 공허한 추구 (300), 자선관광은 서양인들의 양심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엘도라도로 각광받았다 (304), 대중문화는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중문화는 어디까지나 지배사회를 재생산하는 본질적 요소다 (325)
오늘의 진행
- 근황 업데이트, ‘취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기 (제한시간 5분?)
- 지난 책 리마인더, 다음 책 살짝 엿보기, 이번 책 전반에 대한 이야기
- 세 가지 생각할 거리 나눠보기…와 더불어 독서노트 낭독하고, 생각 교환하기
- 기록 사진 남기기
- 다음 모임 전까지 액티비티 논의
- 마무리 발언
- 23시~23시 30분 사이 모임 종료?
누가 나를 만드는가
박완서와 페렉의 소설을 읽은 두 번째 모임에 이어, 세 번째 모임에서는 두 권의 논픽션을 읽어봅니다.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와 오팡시브의 [재미가 지배하는 사회]에요.
본격 ‘자본주의 탐구’ 컨셉의 책 선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대체 어쩌라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탈출구는 있는 걸까요? 물론 그 탈출구가 ‘다함께 행복하게 사는 (옛날식의) 공동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두 책이 반복해서 경고하는 위험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두 책은 ‘알고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것들’을 피하라는 경고처럼 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트위터 상에서) 화제가 된, “우아한 가난의 시대”라는 글을 공유합니다. (2018년 12월에 쓰여진 글이에요.) https://www.harpersbazaar.co.kr/article/39792
세 가지 생각할 거리
- ‘가난’의 기준은? (혹은 ‘부유함’의 기준은?) 물질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 논의해볼 수 있을까요?
- 두 책의 저자들에게: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 나를 만들어낸 것들에 대해. 나에게 취향을 교육한 건 누굴까? (혹은 나의 취향 참조점들은 누구, 어디에…?)
독서 노트들
6권의 책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은 결국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그럼 나의 진짜 취향과 취미는 무엇이지?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며, 막상 찾았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내가 찾은 취향 또한 누군가 주입한 것은 아닐까?’
– 전Oㅇ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혹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가 의도한 그림 속에 빠져들게 된다. 빠져들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어젠다가 그 주제로 설정된 것은 피할 수 없다. 언론의 가장 큰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보도하지 않을 권리’라고 하기도 하지 않는가.
– ㅊOㅎ
전문가에 의한 필요 정의 > 고객 > 소비. 영업 노하우를 얻었다… 나중에 혹시 개업을 하게 된다면 이 문구가 고객유치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중략) 살아오면서 선택을 하고 싶은 것보다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것을 선택했다. (중략) 자유를 일깨워줌으로써 선택을 부추긴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맥락인 듯 하다.
– 박ㅈO
구절구절은 공감이 가면서도 막상 … 쓰자니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현실적으로 어떠한 체제 전복이 가능하다는 거지? 넷플릭스도 안 나오는 무인도 하나 사서 아나키스트로 살지 않는 한 진보의 폐해, 알면서도 속아줄 수 밖에 없는 재미시장의 폐해로부터 어떻게 탈출하라는 거지? (중략) 나도 내가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김OO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초점을 둔 부분은 주로 현재 사회에 대한 단상, 문제점보다 자발적인 행동 능력이 갖춰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무채색의 사회를 보다 다채롭고 결속력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와 같은, 지향성을 가진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 Oㅇㅇ
대중문화는 재미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이 진정한 궁극적인 의미의 행복인 것인지, 내가 쓸모있어지고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되는지 고민만 늘어간다.
-ㅂOㅅ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두 번의 큰 타격이 있었다. 첫 번째 타격은 나 자신을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놀리는 등 일상생활에서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나 전문가 서비스(?)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이다. 내 손으로 하는 것이 너무 없다. (중략) 두 번째 타격은 취미로 하는 나의 이런저런 생활이 다 소비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중략) 그렇다. 생존은 기본이다. 생존이 보장되면 그 다음의 쓸모와 재미는 자유롭게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겠다.
– 김ㅈ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