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1월 2일, 트레바리 [미술아냥] 모임 2019년 9월~12월 시즌 세 번째 모임을 위한 포스팅.
** 아래의 ‘발제문’은 송고은과 박재용의 글과 코멘트를 ‘믹스’한 것입니다. 오늘 모임은 이렇게 진행할 거에요. 참, 이번 책 [예술가의 공부]의 원제는 The Shape of Content 입니다. 직역하면, ‘내용의 꼴’, ‘내용의 모양’ 쯤 되겠죠?
- 발제문 읽기
- 간략한 자기 소개 & 근황 업데이트 (1인당 제한시간 3분)
- 박재용 & 송고은 미술 업데이트?
- 책 전반에 대한 이야기 (내용에서 디자인까지, 무엇이든)
- 세 가지 이야깃거리 함께 보기
- 독서노트 발췌한 것 읽고 의견 공유하기
- 다음 책, 다음 모임 논의, 번개(!) 논의
- 마무리 발언
문득 ,<예술가의 공부> 넘기며 이 전시가 생각났다. 몇해 전 아트선재에서 열렸던 장영혜중공업의 전시 ‘예술가가 되는 길은 인생을 망치는 길’로 무심코 읽힐 수 있는 이 전시의 제목은 전시의 주제와는 상관 없이 많은 예술가들에 자조섞인 동의를 얻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약 벤샨이 오늘의 그들 앞에 서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그리고 벤샨의 이야기가 시간을 거슬러 ‘지금’ 한국에 도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벤샨은 러시아의 통치 아래 있던 리투아니아 코브노에서 태어난 유태인 출신이다. 1906년 가족을 따라 미국에 이주했고 15세가 되던 1913년에는 맨해튼의 한 석판화점에 도제로 들어가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1916년 아트스튜던트리그(Art Students League)를 거쳐 1919년 뉴욕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1930년까지 석판 인쇄공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레터링과 포스터의 정밀한 제작기법을 익혔다. 1925년과 1927년, 두 차례 유럽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오롯이 미학적인 실험에 순수하게 몰두해야 겠다는 변곡점에 들어서며 사회적 목적을 가진 주제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은 ‘사코와 반제티의 수난’으로 1920년 매사추세츠 주에서 살인 강도사건에 대한 불평등한 재판을 받은 두 이탈리아인, 사코와 반제티를 진범으로 몰아 사형시킨 사건을 주제로 표현한 것이다. 심미적인 예술개념을 거부하고 사회적 주제에 직감적으로 반응하여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사회적 시리즈를 구아슈나 수채화로 그려 자신의 명확한 의식과 스타일을 굳혔다.
그가 20대 후반이 되기 즈음인 1930년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의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기겪었고, 이에 대한 솔직한 표현과 새로운 해석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 역시 그림 속 인물들과 비슷한 고통; 빈곤과 실업사태, 활발해진 개혁운동, 급진적 이데올로기의 폭풍 등 을 겪었을 것이다. 이후 1950초와 이후에 – 전전과 전후에는 주로 사진작가로서 활동했다.
(역시나 이 책에 언급되는 것. 이사무 노구치의 대리석 조각. (박재용은) 노구치 미술관에 방문한 뒤, 그동안 ‘대리석 조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온갖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게 되었습니다.)
예상컨데, 당시 60대가 된 이 노예술가는 러시아와 미국의 냉전에 어느정도의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어쩌면 자신의 질곡 있는 운명에 나이보다 더 오래된 사유를 드러낼수 있었을 것 이다. 최근, 1950년대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자연스러운 가교보다는 실패한 사회주의의 모더니스트들에 반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온전히 흡수되지 못한 고유의 세대(Postmodern Anxiety)로 평가된다.
어쩌면, 특별한 몇몇을 제외하고 동시대는 언제나 맞지 않는 옷과 같다. 어딘가가 헐겁거나 끼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런 불완전함이 반복적으로 근미래의 누구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미술 관련 자료를 읽다보면, 과거는 끊임없이 모양을 달리하여 현재에 반복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합니다. 혹은, (자료의 대부분이 서구에서 생산된 것이기에)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부와) 일정한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손ㅎO님이 (아래에 발췌한) 독서노트에 써 주신 것처럼, 이번 책은 [미술아냥] 2019년 9월~12월 모임에서 읽는 책 가운데 유일하게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는 책입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볼 거리
- 인생을 망치는 길 = 예술가가 되는 길?
-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 (혹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
- ‘좋은’ 예술가란 어떤 사람일까 (혹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까)?
미국 하버드대학에서는 1925년부터 해마다 저명한 예술가나 학자를 초청해 미술, 문학, 건축, 음악 등에 대한 이야기와 이론을 듣는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을 열고 있다. (중략) 1956년이면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데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지, 변함없는 불편함이 보이는 것은 아닐지 궁금함에 책을 펼쳤다.
– 김ㄱO
책을 읽고 생각나는 단어는 ‘스카이다이빙’이다. (중략)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로, 내면의 세계로 혹은 학교에서 알려준 정반대의 환경이나 관념으로, 스카이다이빙 하듯 내던져야 한다는 말처럼 다가왔다.
– 임Oㅎ
한 사람 안에 창작자와 비평가가 함께 있다는 장이 흥미로웠다.
– 윤ㅇO
…그래서 나는 대학의 목적과 존재 이유가 지식 쌓기가 아닌 사고과정의 체계적인 훈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예술 분야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사고방식과 관점, 철학에 대한 체계적 훈련이 필요하다.
– 김ㅈO
미국의 경제대공황을 겪고 가난한 삶 속에 활동한 작가이기에 예술가가 가져야 할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 잠재의식, 지각력,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무엇이 중요하다는 인식들, 예술가가 되기 이전에 현재 예술가에게 가장 나다운 예술가가 될 것인지 예술가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을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삶에 가장 힘들지만 힘이 되어주는 잠재력을 다시 한 번 끄집어 내어주는 힘 있는 강의이다.
– 조ㅎO
“비순응성”
예술가를 직업으로 삼으려 하는 많은 이들 중, 현실에 부딪혀본 이들은 그 이후 자신의 인생의 가치라는 단어에 대해서 남들보다는 한 번 더 깊은 생각을 일찍이 가져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스타일 있는 허름함과 어지러운 스튜디오, 뭔가 있어보이는 페인트 자국과 다크룸 등이 그들에게는 낭만으로 다가온다. (중략) 이런 여러 그룹의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시간을 투자했던 그 전공을 얼마나 실제로 이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중략) 남들이 다 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지지 못할 때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을 포기하려면 그만큼 자신이 하는 예술에 대한 가치가 커야 한다는 것이 피부에 와닿게 된다. 그 가치는 남들이 매겨주는 가치가 아닌, 자신의 예술이란 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굉장히 개인적인 가치이다.
– 최OO
이런 ‘일반적’이지 않은 조각들이 작품을 이루고, 더 나아가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수용자에게 다가오는 과정이 나에게는 미술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 김ㅈO
우리는 그동안 많은 책들을 읽었다. 비평가인 클레어 비숍의 “래디컬 뮤지엄”을 읽었고, 철학계 백종원 씨의 “영혼의 미술관”을 읽었다. 일부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비평가의 눈과 관객의 입장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지만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바로 예술가의 입장! (중략) 소설 “산시로”의 산시로처럼 나는 미술을 통해 배우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미술은 역시 좋다.
– 손ㅎO